[바낭] 혼자라는 것

2013.01.17 00:44

에아렌딜 조회 수:5112

안녕하세요. 변함없이... 아니, 이것저것 변한 것은 있지만 어쨌든 국외에 거주중인 에아렌딜입니다.

늘 그렇지만 개인적이고 다소 우울한 푸념을 포함한 내용이 들어있으니 불편하신 분은 패스 부탁드립니다.




1. 

그다지 사회경험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에 있을 때도 나름 직장에 몇 군데 다녀 본 일은 있습니다.

직장에서 저는 출중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도 없는 새파란 코흘리개 같은 거였습니다. 

여자라는 점도 한몫 더해서였는지 늘 잡일은 내 몫이었고 어쩐지 늘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일한다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와서는 많은 게 달랐습니다.

여전히 경험 적고 미숙한 계집애이긴 하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에 실수 천지였지만, 직장 상사가 뭔가 내게 지시를 내릴 때도 항상 '미안하지만 ~~해 줄래?'라는 말을 듣는 것은 정말 아주 작으면서도 뚜렷한 감명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적어도 한 집단에 대해 애정을 느끼고, 소속감을 느끼기엔 충분했습니다.

누구도 내게 인상을 찡그리거나 짜증을 부리는 일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지요.

이 곳에 와 지낸 여섯 달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그 행복은 깨졌습니다.

새로운 한국인 오너가 온 이후로는 정말이지 즐거웠던 회사 생활은 산산조각 박살이 났습니다.


저 자신은 그다지 붙임성이 좋다거나, 같은 한국인으로부터 좋은 인상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항상 얼굴이 굳어있다든지 웃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어서 조금은 신경을 쓰게 됐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오너는 제가 자기 말에 웃는다고 무시하는 거냐고 온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웃어도 피곤하고 안 웃어도 피곤하군요.


왜 저 사람은 가면 갈수록 화를 내는가 하는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

늘 화로 가득차 있는 것 같은 사람은 신기합니다. 그렇게 화내는데 스트레스가 안 느껴지나, 스트레스가 많은데 어떻게 살아있나 하고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이런 타입이 있더군요.

누가 말을 하면 아예 듣지를 않고 무조건 자기 논리를 내세워서 찍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독불장군.

누가 얘기를 하면 듣기는 하는데 결국 자기 생각에 빠져 있어서 남의 얘기를 듣는 데에만 그치고 결론은 역시 자기가 옳다고 내 버리는 사람.

어느 쪽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네요.



저 자신도 긴 우울증 생활 때문에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느낀 것이지만,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즐겁지 않은 인생은 제대로 된 인생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 여섯 달 간은 정말 제 인생 어떤 시간보다도 많이 웃고 행복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모두 회색빛으로 느껴질 만큼... 행복하고 선명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결코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도, 왜 그동안 그렇게 불행했던가 나 자신을 안타깝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언제까지고 있고 싶다고 생각하던 직장이었지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오너 아래에서는 정말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처음으로 내가 조금이지만 도움이 되는, 도움이 되고 싶다고 여길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게 조각조각 부서져버려서 슬픕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힘드네요...

막막하고 불안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요.


절망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희망이죠.

언제 끊어질 지 모르는 동앗줄 하나를 붙잡고 늘어진 것처럼...

잠깐 좋은 직장에서 언제까지나 있고 싶다는 희망이 생겼었는데, 그 희망이 다시 사라져 버려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앞날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없이 무섭고 슬프기만 합니다.

캄캄한 지하에 갇혀서 영원히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3.

예전에 듀게에 이런 내용의 글이 올라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무슨 강연이었던가를 들으셨는데 고생은 사서 하라던가요? 


확실히 인생에 고생도 필요하긴 하겠지만, 전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생이란 건 어차피 바라든 바라지 않든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있나요.


원래 타고난 심성이 곱고 강건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저 같이 나약하고 비틀리기 쉬운 심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더더욱, 고생은 안 하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간 겪은 이런저런 고생 때문에, 곧잘 남을 의심하거나 삐뚤어진 생각밖에는 떠오르지가 않게 되었거든요.

작은 일에도 '누군가가 날 방해하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하고 강박처럼 생각해버리고 이내 삐뚤어진 자기 자신을 자조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남을 의심하기만 하는 거니, 하고.





4.

아마 저뿐만이 아닐 거라고 믿지만, 전 참 기질적으로 혼자 사는 게 적합한 인간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애들은 흔히 몰려다니지만, 전 누군가와 몰려 다니는 게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늘 혼자 있었죠.


누군가와 늘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힘이 들었죠...

왜 사람 세상은 이런 걸까 하고.

외롭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도 좋았었어요.



외로워서 투정을 부리고, 우는 소리를 할 수록 다들 내게서 멀어져 갔죠.

그래서 난 더더욱 힘들어지고 슬퍼지고...

나는 혼자라는 것만은 더더욱 굳어져갔죠.


옛날에는 나 자신이 그렇게도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졌어요.

조금은 나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됐습니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싫어도 나 자신의 안 좋은 면이 눈에 들어오게 돼요.

타인이 좋아해줄 리 없는 외모, 나쁜 성격, 무능함 같은 거.

그래서 늘 자신을 싫어하고... 못난 내가 밉고...


하지만 혼자 있었더니 서투르고 못나고 까탈스런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만은 나 자신을 조금이지만 좋아할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혼자라고 해도, 다행히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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