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2 20:28
[무서운집]의 보도자료를 처음 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게 도대체 뭐야?"라는 것이었습니다.
21세기에 나왔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포스터와 '귀신 들린 마네킹'이라는
서너물 간 설정. 이걸로 공포물을 만들겠답니다. 예고편을 보니 더 경악스러웠습니다.
아, 속셈이 보이네요. 일부러 엉터리로 만들어놓고 화제를 끈 다음 잠시 IPTV에서
한몫 챙기려는 계획이겠죠. 보지 않고 놀려대는 것이 직접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그런 영화들은 요새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의 감독 양병간이라는 걸 알고 조금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한국 에로 영화 끝물에 튀어나온 괴작으로, 결코 만만하게
볼 영화는 아니에요. 당시 나왔던 비슷비슷한 영화들과는 달리 뻔뻔스러움과 상상력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결코 무개성적인 감독은 아니죠.
그래서 이 영화를 상영하는 조이 앤 시네마에 갔는데... 아, 이게 예상외의 영화였습니다.
잘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못만든 영화들이 있습니다. 일부러 못만든 영화도 있고요.
후자는 대부분 전자를 흉내냅니다. 이 영화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감독은
정말 그랬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전 그 말도 믿어요. 그런데도 영화는 의외로
가짜 같지가 않습니다. 일부러 조악하게 만든 게 분명한 장면에도 진실성이
있어요.
내용요... 앞에서 말했지만 귀신 들린 마네킹이 나오는 호러영화입니다. 교외 빌라로 이사온
사진작가와 그의 아내가 아래층에 마네킹 몇 개가 있는 스튜디오를 만듭니다. 사실 그게
정말 스튜디오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색한 마네킹이 몇 개 있는 텅 빈 공간입니다.
남편이 외출하자 아내 혼자만 남고 귀신들린 마네킹이 아내를 공격하는데, 이게 영화
끝까지 갑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엉터리로 못 만든 영화라는 것이 드러나는 건 초반 도입부 계단 장면입니다.
정상적인 영화라면 대사 위주로 편집하고 계단은 짧게만 보여주겠죠.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이
내려가는 계단 모든 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털컥털컥 한 층씩 내려가다보면 관객들은
어이가 없죠.
이 계단 장면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스타일을 암시해준다고 하겠습니다. [무서운집]은
귀신이 안 나오는 쓸데없는 장면들이 귀신이 나오는 장면만큼이나 많이 나오고 또 그만큼이나
중요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진짜로
임팩트가 있는 건 귀신이 아니라 주인공 아줌마의 일상 장면입니다. 집 청소하고 요리하고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먹고 화장실에 가고 자러 침대에 누웠다가 잠이 안 오자 책을
읽고... 이런 게 거의 편집 없이 롱테이크로 갑니다. 거의 [잔느 딜망] 수준이에요.
분명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우스꽝스러운 호러를 만들려고 그런 건
맞습니다. 영화 후반의 [베사메 무초] 신을 보고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그 자체로 스타일을 형성합니다. 계속 보다 보면
그 흐름에 익숙해지고 일종의 의미를 찾아내게 됩니다. (째깍째깍째깍...) 그리고 그
과정이 재미있어요. 처음엔 허탈하지만 반복되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는 거죠. 이걸 '무언가'라고 부르는
건 정확한 이름을 찾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거의 아트하우스 영화입니다. 누군가는 [무서운집]과 [카페 느와르]가 맞장
뜨는 걸 보고 싶다고 했는데, 동시상영하면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일단 먹방 장면만
붙여 놓고 한 번 구경해 봅시다.
영화의 촌스러움은 실제 촌스러움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90년대에 경력이 단절된
중견감독들은 결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촌스러움을 품고 있어요. 그 시대를 넘어서
현대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겐 무지 어렵지요. 만약 이런 사람들이 괜히
쓸데없는 존경을 받으며 '거장'으로서 영화를 만들면 [마스터클래스의 산책]이나
[시선] 같은 영화가 나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촌스러움을 인식하고 그걸 버리지
않으면서 전략적으로 활용하면 [무서운집]과 같은 영화가 나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나 독백, 리듬이 가짜 같지 않은 건 이들이 실제로 그 세대
사람들의 습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심지어 구윤희의 발연기도
그렇습니다. 다들 발연기라고 하고 맞기도 하겠지만, 그게 그 나이 또래 아줌마들의
말투나 사고방식과 얼마나 그럴싸하게 겹쳐져 있는지 생각해보셨나요? 그게
오히려 요새 텔레비전에 나오는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보다 더 진짜에 가까울
걸요.
여전히 못만든 영화인 건 맞습니다. 기술도 떨어지고 조악하고 거칠고 가난하고 유치하고 서툴러요.
몇몇 부분은 대놓고 일부러 그랬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공들여 만든 영화이고 진정성을 품고 있으며
몇몇 장면들은 뜻밖에도 잘 나왔습니다. 전 [무서운집]이 올해 나온 한국 호러 영화
중 가장 창의적인 영화일 수도 있다고 말하렵니다. 단정까지는 못하겠어요.
너무 쉽게 단정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죠.
참, 될 수 있는 한 극장에서 보세요. 이 영화는 진짜 페스티벌 영화입니다.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친구들과 함께 보세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놓쳤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 될 수도 있었는데.
(15/08/12)
★☆
기타등등
엔드 크레딧을 보면 아시겠지만 양병간이 감독, 각본에서부터 시작해서 직접 할 수 있는 건 거의 모든 걸
한 작품입니다. 연기도 했어요. 초반에 나오는 남편이 양병간입니다.
감독: 양병간, 배우: 구윤희, 양병간, 다른 제목: Scary House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Scary_House.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6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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