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밑거름

2011.06.01 02:46

충남공주 조회 수:1454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윤리 선생님이 있었는데 전교에서 왕따였어요.

종이 쳐도 수업을 결코 끝내주지 않으셨거든요.

 

4교시 수업인 날이면 다들 문밖의 급식차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그런데 워낙에 카리스마가 있으셔서 아무도 감히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죠.

 

저도 그때 전교생을 왕따시키던 아이라 일종의 동병상련인지

윤리시간마다 일부러 맨 앞자리로 바꾸면서까지 수업에 불을 살랐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유일하게 시험과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소통을 했던 수업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의 철학 강의만큼이나 알차서 매 시간이 코페르니쿠스 전환이었죠.

 

뭐 애들이 싫어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가르쳐야겠다 싶은 건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너네들 싫은데 내가 나랏돈을 받는 이상 안가르칠 수가 없다고.

대놓고 엎드려 잠을 자도 코만 안골면 돼요. (코만 골았다 치면 분필싸다구 날아갑니다)

 

애들 이름같은 건 거의 불러주신 적이 없었고, 다만 "야 너" 지목해서 뭘 물어보면 자다가 일어나서라도 대답 또이또이 해야하는데

변증술의 달인이셔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 몰라도 결국 해답에 도달하게 되는게 엄청 신기했지요.

이거는 책상이 난지 내가 책상인지도 모르다가 꼭 딴소리 하는 애들이 있었는데, 그러면 칭호를 얻어요. "쟤가 진짜 소크라테스야"

다음시간부터 선생님은 그 친구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릅니다.

등짝을 뚜드러 깨워도 굴복하지 않는 꿋꿋한 청년은 에피쿠로스가 되었죠.

제 칭호는 그냥 반장이었습니다.

딴에는 이름 한번 불려보겠다고 나름의 복수심으로 열심히 듣는 사파들도 존재했지요.

  

어느날은

인생의 좋은 밑거름으로 두 가지가 있다면 자기는

"가난과 지知적 허영심"이라고 생각한대요.

전후 내용은 그대로 기억이 안나지만 그 두 단어가 팍 꽂혀서 이후 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딱 우리학년까지 가르치고 갑자기 교직을 놓으셨는데요, 그때 연세 오십이셨어요.

인생 절반을 생각하는 대로 달려왔으니 나머지 절반은 돌아보겠다며 퇴임식같은 것도 없이 홀연히 퇴장하셨죠.

우리한테는 농담삼아 이제는 택시운전 하실거라고.

 

나중에 졸업하면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연락 드리고 싶었던 은사님이 이분이었는데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졸업하고 처음으로 이름 불린 겁니다!

퇴임하고 책 내셨다면서 일부러 책도 보내주셨어요.

장르는 클래식 음악 에세이. 뜬금없죠.

 

요즘은 뭐하시려나. 조만간 찾아봬야지.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생의 밑거름은 어떤 것이 있나요?

두가지씩만 꼽아봐요

 

음 저는 가난과 지적허영심 받고, 자존감과 열등감이요 

이문세 - 할말을 하지 못했죠

할말을 다 못하면 눈물이 나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183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83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121
244 금요일 저녁, 직장생활 걱정에 안절부절 하는 신입사원.. [14] 탄두리치킨 2012.09.07 3974
243 [아이돌] 아이돌 컴백 러쉬와 카라 1위 기념(?) 금요일 밤의 아이돌 잡담 [9] 로이배티 2012.09.07 3260
242 (기사링크) 각하, 북극시찰.."녹색성장 정신으로 왔다" [9] chobo 2012.09.10 2566
241 (바낭/dew9)네이버 웹툰? 북스? 앱을 쓰고 계신가요.. 강요당하는 느낌이 너무 강한데.. [5] Chekhov 2012.09.10 2269
240 [아이돌] 백아연, FT아일랜드 신곡 잡담 + 광수 아저씨에게 졌어요... orz [15] 로이배티 2012.09.10 4055
239 갑지가 치킨에 맥주가 땡깁니다. 집에 가자 마자 바로! [9] chobo 2012.09.11 2409
238 [아이돌] 오렌지 캬라멜 '립스틱', BtoB 'WoW', 김완선 신곡 등등 잡담 [10] 로이배티 2012.09.12 2822
237 군대 이야기는 괜히 봐가지고... [22] 멀고먼길 2012.09.15 3095
236 (바낭) 해외여행과 관련된 허세 가득한 생각 있으신가요? [25] 소전마리자 2012.09.16 4074
235 디3 시작하고 처음으로 지루하고 심드렁해졌어요. [2] soboo 2012.09.19 1132
234 [강아지] 에잇 이 사람들이~ (사진 큼) [15] 닥호 2012.09.20 3789
233 (디아블로3) 디아블로3는 생활, 다음주가 기다려집니다. 두근두근. [17] chobo 2012.09.21 1276
232 [듀나인] 이번 추석때는 아이돌육상선수권대회 안 하나봐요? [4] 닥호 2012.09.26 2231
231 현영과 김원희가 꼭 닮았나요? [8] 루아™ 2012.09.26 2265
230 두눈뜨고 위내시경 받은 자의 체험수기.. [17] 호롤롤롤 2012.09.26 3989
229 오랜만에 쌍둥이 남매 이야기, 아들과 함께 하는 건프라, 안철수 [24] 에이왁스 2012.09.27 2863
228 추석맞이 설 리 찬 양 [12] 루아™ 2012.09.29 3613
227 잉여스런 질문으로 놀아봅시다. 잭바우어(24) VS 브라이언 밀슨(테이큰) VS 르로이 제쓰로 깁스(NCIS),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그리고 누가 더 미중년인가? [18] chobo 2012.10.02 2547
226 혹시 문 사파리(Moon Safari) 좋아하시는 분 계시나요? [1] 멀고먼길 2012.10.05 1424
225 (듀나 대나무숲 예고편) 조팀장이 오늘 점심 같이 먹자고 했음. 우리 팀장이랑. [17] chobo 2012.10.05 335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