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외의 유명한 고전 이야기가 나올 때면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성경 다음에 많이 읽힌 책이라는 마케팅 문구를 볼 때마다 정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고전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이런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하는 고전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완역본을 읽은 경우는 생각외로 적은 편이죠. 어린 시절 문고판의 쟝발장 말고 실제로 성인이 되어서 빅토르 위고의 완역본을 읽어 본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장발장은 은촛대를 훔치다 신부님의 박애에 감화받고 회개를 말하게 되는 장발장입니다. 하지만 뮤지컬 장발장에서 이런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타이틀 롤이 올라가기 전에 전개되는 프롤로그에 불과합니다.

 

2. 웨스트엔드의 4대 뮤지컬 혹은 카메론 매킨토시의 4대 뮤지컬이라고 불리우는 캣츠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사이공의 라이선스 공연의 초연은 생각 외로 더딘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들어와서야 오페라의 유령을 시작으로 미스 사이공, 캣츠가 제작되었으니까요. 이들 공연의 규모를 감당하기 위한 시장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뮤지컬의 붐을 일으켜 세운 지킬 앤 하이드의 초연이 2004년으로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랍기도 해요. 이젠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체코의 뮤지컬 라이선스가 빈번히 올려지는 편이니까요. 그 와중에서도 레 미제라블의 초연은 매우 늦은 편이었는데 이는 레 미제라블이 가지는 작품의 무게와 규모를 충분히 소화할 만한 역량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인의 말이 있었기에 라이선스 초연에 대한 많은 기대와 또 기대만큼의 우려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라이선스 초연으로는 1993년도에 롯데월드에서 한 적이 있었고 실상 레 미제라블은 중극장에서도 올라오는 규모로만 승부하는 뮤지컬이 아님을 안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3. 긴 시간의 호흡을 두고 근대 유럽 사회의  혁명의 격량 아래에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발장은 올해 올라온 두 편의 초연작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엘리자벳과 두도시 이야기죠. 송스루 뮤지컬이란 측면에서는 엘리자벳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그 격량 속에서 휘말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두도시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 하죠. 이 두 작품은 공연전의 기대와는 달리 엇갈린 평가를 받아야만 했는데 수려한 무대 셋트와 연출은 호평을 받을 만 했지만 상대적으로 내러티브의 디테일과 캐릭터의 설득력에서는 보편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실패한 편이기도 했습니다. 실상 레 미제라블도 같은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원작을 압축하다 보면 캐릭터의 갈등 구조는 단순화 되고 이야기 진행은 다이제스트처럼 빠르게 진행될 수 밖에 없거든요.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 미제라블은 이런 제약을 오히려 특유의 장점으로 승화해 버립니다. 시대는 가난한 자를 범죄자로 낙인 짓고 이상은 꿈꾸는 자를 죄인으로 타락시키는 거대한 운명의 비극 앞에 마주할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레 미제라블은 서사의 점층적인 전개 없이 각 개인의 극심한 감정의 진폭을 아리아에 담아 폭발해 냅니다. 마치 영화로 보면 다크나이트 같아요. 긴장을 늦추는 일이 거의 없이 클라이막스의 반복이라 할 수 있는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송스루 뮤지컬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실컷 활용하듯 함축적으로 각 개인의 고뇌와 행동을 동시에 묘화해 냅니다. 이를 가장 잘 들어내는 장면은 WHO AM I 에서 장발장일 거예요. 스스로의 두려움에서부터 이기심, 자기합리화와 부정 그리고 양심의 실천과 저항과 존재의 선언을 한 번에 담아내면서도 영화로 따지자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서사를 단 한 곡으로 인상적으로 표현해 냅니다. 이런 속도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장발장이 유명한 소재이기 때문일 거예요. 레미제라블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과정 없이도 캐릭터를 설득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5. 이처럼 레미제라블이 정교하게 구축한 서사적인 인과관계 없이도 보편적인 감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상실과 소외라는 문제에 직면한 비루한 자들의 삶을 저항과 기만, 그리고 도망, 하지만 관용과 박애라는 대답으로 나아가려는 각 인간군상을 탁월하게 묘사한 원작의 힘에 있습니다. 각 등장인물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꿈을 염원하기도 그로 인해 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완성에 이른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이야기는 본 작품에서 가장 흥미가 떨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복잡한 심리적 지형을 가진 것은 장발쟝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갈등을 보이는 캐릭터는 그의 대립항이라 할 수 있는 자베르입니다. 그의 고지식함이 시대의 격량에 노출될 때 냉혹해 보면서도 마치 혁명을 말하는 앙졸라처럼 닿을 수 없는 시대의 꿈을 날아가는 이카루스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장발장이 갈등의 해소라는 구조로 나아간다면 그는 오히려 갈등의 고조라는 측면으로 나아가고 그러기에 그의 퇴장은 꽤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6.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를 고민하는 것만큼 각 캐릭터는 좋은 독창을 가지고 있기에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인지 개성 있는 캐릭터의 독창이기에 좋은 넘버가 되는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레미제라블의 멜로디는 캐릭터와 융착되어 서사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0주년 기념 갈라 공연과 25주년 기념 갈라 공연은 이런 레미제라블의 레퍼런스로 자주 언급되는 공연일 거예요. 뮤지컬 팬들에게 레미제라블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기대치가 있고 이런 익숙한 넘버들의 존재는 라이선스 공연의 가장 큰 힘이면서도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7. 하지만 각 배우들의 역량은 팬들의 최대한의 기대치에는 모자라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곡 내에서도 이야기의 전달과 감정의 변곡이 심한 이들 넘버들은 심히 배우들에게 한계에 가까운 표현력을 요구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프리뷰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각 배우들은 솔로 넘버에서 음 이탈에 가까운 흔들림을 보이는 경우가 잦은 편이기도 합니다. 정성화는 발성이 조금 달라졌는데 그로 인해 고음 한계는 조금 높아진 느낌이지만 전반적으로 발성의 힘이 약화된 듯한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라카지에 이어 그의 옷에 꼭 맞는 듯한 이미지의 역할이지만 아쉽게도 라카지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미지 이상의 무엇을 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모습입니다. Who am I 에서나 The confrontation에서 장발장의 강인한 의지를 담아내는 목소리에는 못 미치는 모습인데 상대적으로 bring him home의 애절함은 굉장히 잘 담아내는 편이기도 합니다.

 

8. 자베르의 문종원은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에 좋은 위치이기도 합니다. 단호하고 결의에 찬 자베르의 캐릭터는 문종원의 빼어난 성량과 맞물려 시너지를 불러 일으키기게 충분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독특한 힘을 주는 발성이 호불호를 불러 일으키는 앙졸라의 김우형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테나르디에의 코믹함 또한 잘 표현된 편입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판틴의 조정은은 라만차의 알돈자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모성과 절망 사이의 위태로운 감정의 양가성을 표현하는 것에는 아직은 고민의 답을 내리지 못한 느낌이고 민폐우스와 가제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마리우스와 코젯트는 신인이 가지고 있는 표현력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해 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에포닌의 박지연은 깨끗하고 처연한 보이스 컬러를 ON MY OWN을 감미로움으로 이끌어내지만 그 이상의 깊이를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독창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합창의 힘은 매우 좋아서 1막과 2막의 클라이막스에서 심장의 북을 울리는 것에는 넘치도록 강인한 편이기도 합니다.

 

9. 무대 연출은 회전무대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레미제라블 초연 버전이 아니라 25주년을 기념하여 수정된 맷 캔리의 무대로 선보여지고 있습니다. 회전무대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최근 뮤지컬 추세에 걸맞게 굉장히 빠른 무대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프로젝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조명의 활용은 다른 뮤지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매우 제약되어 있습니다. 이런 프로젝션을 활용한 무대는 동적 연출에는 강점을 보였지만 무대를 깊게 쓰고 전반적으로 어두운 무대로 인해 OP석 3열에서도 배우들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무대의 좌우를 좁게 쓰고 딱히 시야각을 발생할 만한 연출은 없는 편이므로 가능한 관람시 좌석은 좌우 사이드 상관 없이 앞자리에 근접한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10. 포은아트홀은 신생 극장이지만 불행히도 블루스퀘어의 단점과 성남 아트센터의 단점을 모두 믹스해 놓은 듯한 극장입니다. 종합극장을 염두에 둔 잔향설계는 배우들의 명료한 가사 전달에 제약을 주고 있고 사운드 믹싱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듯 오케스트라의 다이나믹스에 배우들의 다이나믹스가 조화되지 못해 클라이막스에서 배우의 목소리가 묻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오케스트라 핏이 굉장히 넓고 1열과 5열까지의 단차가 없으므로 앞자리에 의한 시야방해가 쉽게 발생하기도 합니다. 2층은 매우 멀리 있으므로 전체 조망을 위해 2층을 선택하는 것에는 별다른 메리트가 없습니다. 신생극장 답지 않게 프로젝션 밝기는 매우 어둡고 서치라이트 조명도 그다지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일한 장점이라면 좌석 간격이 매우 넓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무대와의 거리는 더 멀어 보이니 이것을 마냥 장점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프리뷰라는 의미는 장발장이라는 뮤지컬보다 이 극장의 시설 점검에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11. 현재 포은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레미제라블은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다이아몬드 같습니다. 이 뮤지컬이 올해 최고의 뮤지컬이라고 추천은 하지 못하겠어요. 이는 포은 아트홀이 가지는 시설적인 한계와 라이선스 공연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전달의 한계, 그리고 최고의 공연 실황과 비교당해야 하는 배우들의 한계를 절감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이 가지는 에너지는 아쉬움의 거품을 제거하더라도 여전히 강렬한 감흥을 선사해 줍니다. 그리고 이런 감흥은 장발장을 알면 알수록 그리고 뮤지컬을 보면 볼수록 더 커질 확률이 커요. 쉽게 비루하다고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의 섬세하면서도 거대한 삶의 지표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뮤지컬이니까요. 때문에 레미제라블은 보편적이기에 가장 특별한 감흥을 주는 뮤지컬의 레퍼런스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내일로 나아가면서 좀 더 멋진 레미제라블이 되어서 내년 4월 서울 공연 때 더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158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58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0870
65515 이 배우 인상 어떤가요 [8] 가끔영화 2012.11.13 3029
65514 드라마의 제왕 [7] 달빛처럼 2012.11.13 2983
65513 그냥 흔한 레고 장난감 [6] 닥터슬럼프 2012.11.13 2952
65512 태연 런데빌런 직캠 catgotmy 2012.11.13 1904
65511 바낭/올바른 투표를 위한 단체 과외. [3] maxi 2012.11.13 1273
65510 Sufjan Stevens 의 새로운 크리스마스 앨범 [7] 아니...난 그냥... 2012.11.13 1460
65509 (기사링크) 와, 정말 올해 최고의 X소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2] chobo 2012.11.13 3595
65508 어떤 박근혜 후보 지지자의 논리 [3] amenic 2012.11.13 1705
65507 광수사장, 코어콘텐츠 미디어, 남녀공학에 대한.. [9] 아리마 2012.11.13 3874
65506 여러 가지... [15] DJUNA 2012.11.13 3181
65505 [속보] 방통위, 일베 유해사이트 지정 검토 [15] Kriemhild 2012.11.13 4383
65504 그런 주인공들 보고싶다 [14] 브누아 2012.11.13 2229
» 두손을 모아 볼 수 밖에 없었던 레미제라블 라이선스 공연 후기 (2012.11.09) [4] 질문맨 2012.11.13 3153
65502 소녀시절의 물건들 정리/크리스마스 분위기/트리만들기 [10] munich 2012.11.13 2643
65501 <타이거! 타이거!> 추천받아 읽고있어요 +' 존트'라는 개념 [17] 베케이션 2012.11.13 2492
65500 잠깐 첫눈이 내렸네요. [4] 이드 2012.11.13 1442
65499 이거 어떤 영화보다 더 웃기네요(조회수 1억 넘을 듯) [9] 가끔영화 2012.11.13 2646
65498 듀나In) 신촌 이대쪽에 성냥 살만한 곳 있을까요? [3] maijer 2012.11.13 1370
65497 우리 나란엔 왜 뮤지컬 드라마가 없을까요 [15] 교집합 2012.11.13 2279
65496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에 대한 제 기억... [28] DJUNA 2012.11.13 300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