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25 08:15
[파이브 히스테리아]는 인도네시아의 젊은 감독들이 만든 다섯 편의 단편들을
묶은 옴니버스 호러영화입니다. 완전히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고,
기획 단계에서 어느 정도 의견 교류와 공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드리안토 데요가 감독한 [Pasar Setan(Demon Market)]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동행을 찾아 헤매는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어서 영화는
비슷한 장소에서 역시 길을 잃은 남자를 보여주고 두 사람은 어느
시점에서 잠시 만나 동행하게 됩니다.
반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척 전통적이라 충격효과 같은 건 없고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야기도 결국 세 명의 사람들이
산 속을 돌아다닌다는 것이 전부고요. 하지만 사족 같은 결말을
제외하면 영화적 리듬감이 좋은, 우아하고 시적인 영화입니다.
이 정도면 좋은 시작입니다.
차이룬 니사가 감독한 [Wajang Koelit]의 소재는 인도네시아
전통 그림자 인형극입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니콜은 그림자 인형극을
구경하다가 인형 조종사의 비녀를 줍게 되는데, 그 뒤로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감독에 따르면 영화는 인도네시아 고유문화에 대한 서구 문화의 오만한
접근을 꼬집으려 했다더군요.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그 나라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보고
전통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오만방자한 서구인이라 무작정 밀어붙이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대부분의 대사가 영어였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니콜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억울한 이야기죠.
전 (그림자 인형극에 사용되는 가죽 인형에 대한 몇몇 이야기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결말도 너무 인공적이라 별로였습니다. 나머지
공포 효과들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빌리 크리스티안의 [Kotak Musik(Music Box)]는 회의적인 여성 과학자가 낡은 뮤직박스와
소녀 귀신에게 시달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전 이 영화도 거슬렸는데, "이, 오만방자한
과학자야, 영혼의 세계를 존중해라!"라는 협박이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원래 이 장르에서 회의주의자가 영혼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그런
협박은 도대체 뭐랍니까? 대부분 이런 주인공들은 일단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귀신
사연 같은 건 잘 들어준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냥 협박과 고문만 하고
끝나요. 어쩌라고.
니콜라스 유디파르의 [Palasik]에서 제목의 'Palasik'은 서수마트라 섬의 전설에
나오는, 머리와 몸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괴물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결혼한지
얼마 안 되는 임신부인데, 남편과 전처가 낳은 딸과 함께 시골 별장으로 놀러갑니다.
그런데 그 별장에서는 팔라식의 행동으로 의심되는 괴상한 일들이 일어나요.
[Palasik]은 이 영화의 얼굴 마담입니다. 포스터나 보도자료,
오프닝 크레딧의 디자인에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쓰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가장 떨어져요. 영화 전체가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공포효과의
연속이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죠. 이야기도 잡다한 인상이 강하고.
잘 다루었으면 효과적이었을 마지막 반전도 그렇게 처음부터 결과를 공개해놨으니
효과가 깨지는 건 어쩔 수 없잖습니까.
하르반 아구스트리안시아의 [Loket(Ticket Booth)]은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무서운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사를 거의 쓰지 않고 오로지 악몽의 비논리만으로
공포효과를 창출해 내는 테크닉이 상당합니다. 결말의 권선징악이 조금 노골적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그것도 영화가 거기까지 잘 했기 때문에 그렇죠. 첫 번째 단편과
함께 이 옴니버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옥석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게 옴니버스 영화라고 합니다만, 이 영화에는 옥보다 석이
조금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별 인상을 받지 못했던 영화들도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걸 고려한다고 해도 이 영화에 나오는 몇몇 에피소드의 태도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습니다. 이게 일반적인 것인지, 이 시리즈에만 국한되는 것인지 알려면
인도네시아 영화들을 몇 편 더 봐야겠죠.
(12/07/25)
★★☆
기타등등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는 [뮤직 박스]의 주연배우 루나 마야입니다. 소문을
들어보니, 이 영화를 찍기 전에 보이그룹 멤버인 남자친구가 인터넷에 유출시킨 섹스
동영상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여기나 거기나... 그래도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런 일에 대해 엄격한지, 지금 그 남자친구는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랍니다.
감독: Adriyanto Dewo, Chairun Nissa, Billy Christian, Nicho Yudifar, Harvan Agustriansyah, 출연: Tara Basro, Bella Esperance, Egy Fedly, Kriss Hatta, Dinda Kanyadewi, Luna Maya, Ichi Nuraini, Maya Otos, Poppy Sovia, Imelda Therinne, Sigi Wimala
IMDb http://www.imdb.com/title/tt225182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7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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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야기는 어째 감독의 변이 좀 이상하군요. 저는 오히려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었는데.
세번째 얘기의 주제는 [어웨이크닝] 에서 아주 잘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유령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런 얘기를 다룰 수 있는데 말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