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간 뜸했었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늘어놓아 볼까 합니다.

그야말로 이 게시판에서 쓰이는 의미 그대로의 바이트 낭비 ㅡ 바낭입니다.

별로 영양가는 없어요. 들어 줄 사람 있을지도 모르겠고,

(일기는 일기장에! 라고 하실 분도 있겠습니다마는...)


어쨌거나 살아는 있습니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지난 11월 한 달간

너무 많은 일들이 폭풍처럼 지나갔네요. 정신이 므엉합니다.


1.

11월의 시작은 활기찼습니다. 모친이 환갑이시기도 하고,

지난 여름에 업무 관계로 여름휴가를 전혀 쓰지 못했고, 큰 맘 먹고

가족 중에 모친만 모시고 여행을 갔죠. 같이 가려던 누나네 가족은

집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다음 기회로.


태어나서 두 번째고, 오롯이 제 능력으로는 처음 가 보는 해외였습니다.

특히나 처음 갔던 여행이 중국 대륙 중에서도 정치적 심장 베이징이었고,

두 번째 간 곳이 그 극단에 있는(?) 국민당의 본거지 타이페이였던지라...

뭔가 묘하게 관광이라기보다는 고적답사하러 간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기대 많이 했던 고궁박물원을 좀 더 찬찬히 보지 못한 게 아쉽네요.)


대만 방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과거 박통이 롤 모델로 삼은. 아니 박통 이전에도 뭔가 벤치마크했던 나라가 어딘지

대충 감이 오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국가들 아닌가...

그러나 두 나라(현재 중국은 이 중 하나를 인정 않지만..)의 걸어온 길, 걸어갈 길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달라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 우유가 맛있더군요. 덕분에 제대로 과민성 대장(....)

대만에서 유명하단 우육면은 못 먹었습니다. 서문정 거리 같은 곳에 많이 보이긴 하던데..

- 대만 여행에서 제대로 즐길 포인트는 타이페이보다는 외려 타로코(태로각)협곡이나

예료우(야류) 지질공원 같은 자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 단 하나, 교통 시스템은 우리보다 발달해 있었습니다. 완급결합 잘 되어 있는

열차 운용이나(한국으로 치면 종로3가 같은 지하철역에서 바로 장거리열차를 탑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신호등은 이 분야에서 밥벌어먹고 사는 놈으로서 참고할 만 했습니다.



2.

귀국 직후, 집안에 큰 일이 일어나서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일은 제게 벌어졌더군요.

5일 휴가 중 마지막 날을 오롯이 병원에 들이부었습니다.

예전에 듀게에도 쓴 적 있는지라 기억하는 분도 있겠지만,

요새 왼쪽 눈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름 건강검진 결과도 좀 마음에 걸리고...

해서, 사는 동네의 대학병원에서 수십만원을 들여 검사했습니다.


몸이 있는 대로 망가져 있엇습니다. 특히 안과가 좀 문제더군요.

교수 왈 너무 늦게 왔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느냐.

일단 오른쪽 눈은 레이저 시술 (아주 예전에 받았던..) 추가로 하면 되겠지만

왼눈은 수술만이 답인데 성공 확률은 30% 이하다. 그래도 그것밖에 답 없다.

일단 왼눈에 항체주사 한 대 놓고 나서 한 달간 경과를 보고 나서 어떻게 하자...


hbA1c 9.9, FBS 316(!), BP 156-94mmHg(81/min),

단백뇨는 1000이 넘어가고, 거기에 혈뇨까지.

이건 뭐 사람이 아니라 좀비 육체를 끌고 다녔더군요....

병원에서 란투스(인슐린) 18단위 처방받고 혈압약과 고지혈증 약도 받았습니다.

병원 대기실에서 어머니께서 뚝뚝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정신이 듭니다.

동네 대학병원이 아니라 한국에서 제일 잘 한다는 의사를 찾아 안과 진료를 다시 받았습니다.

동네 대학병원에서는 못 잡아 내던 백내장도 같이 잡아내더군요.

결국 왼눈이 안 보이던 건 망막증에 백내장이 겹쳐 발병한 거였습니다.

혈관이 증식해서 망막을 잡아당기는 중인데 거의 떨어져나가기 일보직전이라고 하더군요.

(근데 어쩝니까. 턱으로 사람 부리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여의도로 오라가라하는게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인데... 국정감사 시즌 중에는 어쩔 수가 없으니...)


여튼 검사비만 65만원 ㅡ 거의 100만원, 이번 달 들어 여행경비까지 근 300만원이

훅하고 나가는 걸 보니 정신이 아득합니다. 마이너스 통장은 대체 어쩌나 싶습니다.

집에서는 회사 그만두라고 난리고,

내가 회사 그만두면 앞으로는 뭐 먹고 살라고,

몸 다 낫는다 쳐도 그 나이에 어딜 새로 취직할 수 있냐고

어찌 그리 세상을 모르시냐고, 다 학교같은 줄 아느냐고 싸웠습니다.

솔직히 거기서 인생 접어버릴까 생각도 잠깐 했는데,

그 결심을 할라치면 다른 게 못할 게 뭐가 있겠느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길게 보고 마라톤으로 가야 한단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구 어쩌나 싶어 기분으로 매진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삶이 젖어 있는

시스템을 하나하나 조금씩 고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매일 1시간 반씩 운동 ㅡ 회사 체력단련장 ㅡ 하고,
주전부리를 끊고 식사도 오로지 도시락으로 들고 다닙니다.

구성품을 보면 숫제 풀인데 그간 맛난 것만 찾고다닌 것에 대한 빚인가 싶어

우적우적 소스도 없는 맨풀만 씹었습니다. 김치도 짜다 하여 안 먹었습니다.

소스를 전혀 치지 않은 샐러드, 현미 잡곡밥, 오이, 가끔 가다 두부 삶은 것,

정말 못 견디겠을 때는 땅콩 조린 것 한 끼에 딱 세 알, 고등어 구운 것 한 점.

이렇게 저염식에 저칼로리로 식사량도 스스로 엄격히 제한한 지 스무날째입니다.

사회생활 하며 아예 고기나 그런 자리를 피할 순 없을테니, 최대한 덜 먹을 수 있을 때

아껴서 먹자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먹다가 안 먹으니 눈앞이 좀 노랗기는 하데요.


11월 28일 현재 A1c는 보름만에 9.9에서 8.8로 줄었고, 혈뇨와 단백뇨도 없어졌습니다.

FBS 102(식후 138), BP 74-98(120)mmHg(91/min)... 좀 사람다워졌습니다. 

운동 하니까 상쾌해지는 기분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높은 당화혈색소 수치 때문에 서울대병원에선 수술 동의 못한다고 펄쩍 뛰더군요. 

같은 병원 신장내과에서 분명 혈액검사를 보고 OK를 했는데.... 차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시 동네 대학병원으로 와서 수술에 대한 소견서를 써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그냥 써 달라고 해서 써 준 건지 진짜 괜찮아서 써 준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뭐, 안 되면 한쪽 눈 애꾸로 6급 장애인 등록하고 살면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구요.

여튼간에 4일에 수술날짜를 잡아 놨습니다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서울대병원에서는 안 되겠다는 소린 안 하고 해 봅시다 라고 하는 거 ....

그게 희망입니다.



3.

10월 말에 소개팅을 해서 애프터까지 잡아놓은 여자사람이 한 분 있었습니다.

주선자 족으로 건너들은 얘기는 상대방도 딱히 나쁘지 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빼어나게 경국지색이라거나 키가 크다거나 하는 소위 스펙좋은 사람은 아니엇지만

착하다는 인상에 호감가는 이미지라 몇 번 더 만나 볼 요량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사정 때문에 그 다음 주에 못 보고, 그 다음주에는 제가 출국하고,

그 다음에는 남아있는 월차와 병가 소진해 가며 병원을 뛰어다닌 탓에

뭔가 어정쩡해져 버렸고, 며칠 전, 이대로는 아닌 것 같아서, 전화로 사정 설명하고

제가 일단 놓겠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은 쾌유를 빌며 저더러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시작하지도 않은 인연인데 무슨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클리셰처럼 서로가 말을 주고받고

생각에 교감을 하는데 헤어지는 뭐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일도 가능하긴 하구나 싶습니다.



생각할수록 삶이란 참 별거 없는 것 같으니, 되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 싶습니다.

혹시 압니까, 골골팔십 아우구스투스처럼 살지, 아니면 나아가서 몸짱이 되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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