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한 달이 벌써 넘었죠. 1월 초반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눈 뜨면 정오나 오후 1시 사이 또는 오후 3시가 다 된 적도 몇 번 있었죠. 저는 늘 잠이 저절로 깰 때까지 잘 수 없는 현대 도시인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했는데, 퇴사 이후엔 수술 직전 마취에 스며들 듯, 모르핀 같은 잠이 신의 가호처럼 쏟아졌더랬죠. 이건 정말 마약같은 것이고, 저는 충분히 중독되었어요. 덕분에 늘 실핏줄이 벌겋게 터져있던 제 눈자위는 맑아지고... 때 되면 자연스레 일어나 배 고플 때 한두 끼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저녁 때 잠깐 운동가는 것 말고, 대부분의 낮엔 외출하지 않고 거실에 불조차 켜지 않은 채 최저치의 데시벨만 허용한 테레비 볼륨을 맞춰놓고 무위 (無爲).
정말 이렇게나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달여의 시간을 보내본 적은 제 인생 처음인 것 같네요. 한창 바쁘게 직장을 다닐 땐, 우리 고양이는 제가 아침마다 신발장에서 급하게 힐을 고르고 있을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다소곳하고 예쁜 자태로 나를 바라봤었죠. 잘 가(가지마), 나를 잊어줘 잊고 돈 벌어 줘(나를 잊지마). 그 눈빛과 표정으로 미동인 채 나를 바라보는 눔에게 다시 달겨들어 껴안고 뒹구느라 몇 분이 훌쩍 가버리면 그 사이 지각이라도 할까봐 그렇게 헐레벌떡 뛰던 세월이 벌써 오백 년 전 같아요. 그리고 온종일 같이 지내면서... 생각 만큼 제가 우리 고양이와 몸으로 충분히 놀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젖어들 즈음, 지엄하신 고양이는 어느덧 저에게 사흘 굶은 시에미상을 하고 못마땅해 하는군요. 세상에, 나보다 잠을 더 많이 자는 인간은 처음 봤다. 이럴 바엔 차라리 다시 나가서 돈을 벌어... (그런데 옹아, 이젠 어디서도 쉽게 날 불러주지 않을 것;;; )
그래도 날씨가 풀린 저녁엔 담요에 고양이를 둘러싸서 즐겨찾던 와인샵도 가고 다 떨어져버린 커피도 볶아서 갈아 오던 길, 늦은 저녁 길에서 마주친 귀가 하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 고양이를 이쁘다 해주고 샵 주인들도 아무 거부감없이 옹이를 들여줘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지요. 이렇게 표면만 보면 무슨 한갓진 술과 장미와 고양이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하지만, 어머 이건 사실이지요. 저는 그냥 표면적으로나마 이런 말도 안 되는 한량을 즐기는 제 시간들을 뻔뻔히 인정하기로 했어요. 고양이의 사료와 모래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2. 저는 나름 어떤 특정 분야의 예술계통의 고급관객(?)이자 날카로운 아마추어 비평가이기도 하죠. 그렇게 된 배경엔 제가 가진 열정과 욕심 만큼의 예술행위를 할 수 없었던 물리적인 배경이 존재하고(라고 쓰지만 결정적으로는 재능이 없었다고 읽으세요), 그럼에도 아주 뜨겁게 그 분야를 질투하지 않고 동경할 수 있는 애정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는데... 그 분야의 대가가 한참 시절에 절정이었던 기량을 보여준 공연을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뿐인데, 이 기억이 상대방에게는 너무 특별한 공연으로 남아있었던 것인지... 생각치도 못한 공연에 VIP 초대를 받아 갔었습니다. 그날 온통 흐리고 눈이 내렸지만, (놀고 있던) 저와 혈연인 언니는 한껏 멋을 내고 공작부인처럼 하고 갔지요. 이미 저를 초대한 그 특별한 공연자와는 공연 전후로 인사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을 사전에 익스큐즈 했으나, 그나마 답례를 하고 싶어서 혹시라도 대기실에 전달할 수 있을 지 몰라 들고간 우드앤브릭의 달달 500% 애플파이는 끝내 주인공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결국 언니에게 돌아갔지만 그날의 공연은 최고였고, 여전히 그 특정 분야에 현존하는 최고의 아티스트가 누구인 지 다시 확인하고 왔으니 이미 저에겐 감동과 충분한 힐링이 되었죠.
3. 관련하여, 여러분은 유진박의 바이올린 연주를 눈 앞에서 진짜로 들어보신 적 있나요? 아, 물론 당연히 저를 초대한 아티스트는 유진박이 아닙니다만... 그날 공연자 중 유진박이 포함되어 있었고, 한 번도 그의 연주를 직접 듣지 못한 채 그의 루머만 실컷 들었던 저는 여러 가지 불신으로 시큰둥하게 그의 등장을 바라봤죠. 게다가 그가 처음 연주하기로 한 곡은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누가 활을 그어도 기본은 할 것 같은, 발레로 따지면 특정한 스토리 없이 볼거리로도 충분한 디베르티스망을 추는 무희의 기교를 보는 것처럼 뻔한 감흥, 같을 줄 알았으나... 기적은 바로 그 전부터 옆자리에서 자꾸 핸드폰 액정을 켜대며 소곤거리는 잡담을 일삼던 일부 중년여성 무리를 일순 잠재우는 것으로 나타나더군요. 그의 연주는 관객 모두 뿐만 아니라 방귀 깨나 뀔 법한 정식 오케스트라 단원들 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었어요. 그가 연주하는 전자 바이올린에 대한 뚜렷한 편견은 없었지만, 오케스트라석에 앉아 켜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의 클래식 악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아주 가비얍게 뛰어넘어 버리는 그 음색과 기교에 저는 숨이 멎었습니다. 거기에 대고 누구를 비하면 좋을까요. 흉흉하게 떠돌던 그에 관한 소문과 진실들, 도움 되지 않는 사람들의 탄식들이 다 무색할 정도로... 그는 이미 그 이상한 유명세를 뛰어넘는 연주를 했고(하필 선곡마저 그러했으니), 그날 유진박의 연주는 제 개인적으로 직접 들었던 바이올린 연주 중 베스트 5위 안에 들법한 것이어서 자칫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나머지 곡들은 그가 MR반주를 토대로 한 전자 바이올린 곡 레퍼토리여서 너무 기계적인 주법으로 연주하여 전곡의 여운이 아쉬울 법도 했지만, 그렇다한들 저는 유진박이 전대를 차고 식당연주를 돌았건 어쨌건 끝까지 바이올린을 놓지 않았다는 게, 혹여 모진 놈한테 손가락이라도 상했으면 어쩔 뻔 했는지, 그러지 않은 게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안도 했습니다.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미약할 수도 있는 제 음악감상자로서 유진박은 그냥 아이같이 천진무구한 준천재 연주자였습니다.
4. 예전에 제가 다니던 헬쓰클럽이 한 달이 넘는 리모델링을 감행하고 재개장 했다는 소식을 전했지요.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건 너무 말끔하게 정비된 라커룸과 샤워부스 그리고 무려 새로 생긴 자쿠지 욕조와 편백나무 사우나 시설입니다! 정확하지 않지만 김애란이 어느 소설에서 그랬지요... 도시인으로 살면서 돈을 버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듯 여유로운 목욕과 샤워용품을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 이후 샤워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혹시라도 운동이 지겨워 도무지 인내심을 가질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면 저는 감히 이런 종류의 소비를 부추기고 싶네요.
운동이 너무 하기 싫고 도무지 재미를 붙일 수가 없다면... 과감히 운동복에 투자해 보세요. 헬쓰 전용 운동복이나 또는 요가나 필라테스 때나 입을 법한 전용 운동복을 사서 입어보세요. 그러면, 5분만 더 10분만 더 아니 이대로 (마감시간까지) 영원히, 거울을 보며 자신을 바라보며 운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거기 거울 속에 작금의 세태나 유행에 따른 유승옥이나 박초롱 같은 핫바디가 존재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혹여 그만큼 완벽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사이즈 형편대로 지금 막바지 세일 중인 나이키프로나 스텔라 맥카트니의 기본에 바디짐이나 또는 루카스휴의 피트니스룩을 구입하여 그것을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초중년이라면 아직 구정 지나지 않은 새해인데, 운동 각오로 이만한 게 없다는 것을 금방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100% 캐시미어 코트나 하다못해 실크 블라우스에 투자하는 돈의 아주 일부로도 이미 그 효과는, 절반의 성공일 수 있다는 것도요.
2015.02.04 03:26
2015.02.04 17:34
네, 아직 살아있습니다. 레스토랑은 한동안 쉬다가 지금은 삼청동에서 좀 젊어진 컨셉으로 리뉴얼 되었다고 하고요. 베이커리도 여러군데 운영중입니다. 광화문 시절의 나무와벽돌이야말로 저에겐 너무나 소중한 추억의 장소였죠. 벽난로가 있던 자리 ㅎ ㅎ.
2015.02.04 04:50
잠이 오지 않아 무심결에 듀게에 들어왔다가 반갑워서 댓글 남깁니다.
쿠델카님의 글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눈팅족입죠.
고양이를 데리고 외출을 할 수 있다니.. 부럽네요. 제 녀석은 당최 겁이 많아 엄두도 나지 않아요.
몇달전 2박 3일 무단 가출 이후 당최 제 곁을 떠나려하지 않구요. (지금도 무릎에 앉아 졸고있네요)
2월 1일, 손목부상이후 근 1년여만에 헬스장을 다시 찾았어요.
좀 더 싼 곳을 알아봤으나 동선이 좋지 않아 결국 다니던 헬스장을 다시 찾으며 '그래 돈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다니자.' 다짐했죠.
옷이던 장비던 적당한 투자는 확실히 효과가 있는것 같아요.
싼 보급형 댄스화를 신다가 비싼 맞춤형 탱고화를 사고나서 탱고를 더 열심히 추기도 했구요.
새벽이라 쓸데없이 댓글이 길어지는군요. 아무튼... 마지막 문단에 저도 한 표 추가!!
2015.02.04 17:38
앗, 안시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울 고양이도 산책줄만 봤다 하면 줄행랑을 치는데요, 이 눔은 목소리만 애옹거리지 실제로는 호기심이 아주 많아 사방팔방 두리번거리며 나름 즐기는 듯 해요. 이젠 다 컸다고 무릎냥은 잘 안해주고요. 그런데 탱고를 추시는 분이셨군요, 멋지셔라!
2015.02.04 05:02
저도 고양이와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깨고 싶을 때 깨고 (그런데 이건 안 될 듯. 항상 저희 주인냥이 먼저 깨서 집사를 깨웁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스트레스 받기 직전까지만 무엇엔가 몰두하면서 한 달 만 (사실은 평생) 살아보고 싶습니다.
현실은 뭐... 두통이 없는 날이 오히려 더 드문 그런 생활.
2015.02.04 17:40
네, 온종일 고양이와 함께 할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해요. 저도 뭐 고양이가 알람이라 중간에 한 번은 깨지만요. 이 행복과 평화도 잠시, 저도 슬슬 초조해지는 시기가 곧 오겠지요... ㅜ
2015.02.04 08:14
3. 눈앞까진 아니지만 세종문화회관에서 단독 콘서트할 때 갔어요. 그때 참 멋있어서 팬이 되었는데 그래서 최근 인터넷으로 떠도는 얘기가 더 마음이 아픕니다.
2015.02.04 17:41
그러게요 90년대에 그의 명성은 지금 아이돌스타 못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어쨌든 아직도 꾸준히 연주를 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겠죠.
2015.02.04 08:38
2015.02.04 17:42
소비를 조장하는 제 글에 동조를 해주시다니, 반갑군요!
2015.02.04 19:17
2015.02.04 23:01
이상하게 운동은 며칠 연달아 쉬면 정말 더 가기 싫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3일 연속 빠지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워놓고 지키고는 있지만, 빡센 직장생활 중 스트레스 많이 받을 때면 저도 한 일주일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쉰 적도 있어요. 암튼,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회복되시길!
2015.02.05 09:00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ㅅ';;; 저도 벼르고 별러서 세일하는 스텔라 매카트니 운동복 아이템 한 개 샀는데...
역시 안어울리더라고요. 세일할 때 남아있는 색으로 사서 그렇다고 혼자 정당화하고 있어요.
2015.02.05 14:52
ㅎ ㅎ 어떤 색상의 디자인을 사셨는지 궁금하네요. 스텔라의 색상과 디자인이 선뜻 고르기엔 좀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지요만, 저는 이번에 구입한 거 다 맘에 들던데요. 암튼 토끼님도 미쿡서 열심히 운동하셔요!
2015.02.04 08:52
2015.02.04 17:43
저도 곧 다시 어딘가로 나가야 하겠지만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는 아무 감도 안 오는 현실이라서요;;; 맞아요, 유진박은 정말 바이올린 연주밖에 모르는 순박하고 천진한 아이처럼 보였어요.
2015.02.04 12:10
유진박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중학생 때 학교 강당에서 유진박이 연주를 했었어요. 정식 공연의 형태도 아니었던것 같고, 애들도 그냥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하는 수준으로.. 유명한 사람이 왜 여기서 연주하는거지..? 라고 생각하며 호기심에 저도 보러 갔었죠. 아이들은 산만하고 통제하는 사람도 없어 공연할만한 여건이 되는 공간이 전혀 아니었는데, 유진박은 그런 외부적인 것들은 신경쓰지 않는것처럼 보였어요. 어렸을 때라 연주가 어떤지는 몰랐지만,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연주에 완전히 몰입하는 모습이 인상에 깊이 남아 있어요.
2015.02.04 17:45
아마 유진박이라면 그랬을 것 같아요, 연주자들이 흔히 갖는 예민한 자의식보다는 연주 그 자체를 좋아하고 즐기고 그것에만 집중하는 사람 같아요. 그래서 그의 지금의 힘듦도 더 좋아지기 위한 과정이겠거니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2015.02.04 15:23
담요에 싸여 외출하는 외출냥이라니...
집사 보람 느껴지겠습니다..
당분간 집에 계실거라면 저렴한 그라인더를 하나 마련하시길 추천합니다.
즉시 갈아먹는 원두와 갈아온 원두로 만드는 커피의 차이는 하늘과 땅..아니라 하늘과 지하라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요...
2015.02.04 17:49
보람은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제가 무슨 넝마주이인 줄 알지도 모르죠 ㅋ.
이제 세상이 저를 알아주지 않는 나이가 되었으니 당분간이 될 지 더 긴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라인더는 관심은 있었어요.
여름숲님 같은 전문가 말씀대로 원두커피맛이 엄청난 차이겠지만, 저같은 게으름뱅이가 그라인더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군요. ㅎ
2015.02.04 20:04
1. 저도 요즘 정오는 다 되야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네요. 날이 추워서 그런가 하고 있어요. (직장생활 접고 프리랜서 되니까 더 그런듯요.) 어서 날이 따뜻해지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도 눈이 다 맑아지셨다니 다행이네요. 쌓인 피곤에는 잠이 최고죠.^^
2015.02.04 23:04
에고고 힘들게 회사 다니면서 피곤하신 분들이 훨씬 더 많을 텐데 저는 이렇게 시절 좋은 소리나 늘어놓고 있네요. 프리랜서를 할 만한 능력도 안 되면서 지금 막 한 달을 무위로 넘기긴 했는데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도래할 지, 사실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충분히 잤더니 눈은 진짜 맑고 반짝거리게 되었어요!
2015.02.06 03:34
2015.02.07 01:07
어머낫, 철 지난 게시물에 넘치게 과분한 이런 댓글이라뇨! 퇴사한 지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이상하게 아직까지도 글 쓰고 싶은 마음 책 읽고 싶은 마음이 회복되지 않아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펌프질의 탄력이 끝나기 전까지 어떤 노력을 제가 할 수 있을 지, 깊이 고민해 볼게요!
나무와 벽돌이 아직 살아있단 말씀이신가요.. 다른 1.2.3.4.에도 덧대고 싶은 말들이 참 많지만서도 그냥 하나만 여쭙겠어요. 나무와 벽돌이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