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내 친구에게 생긴 일

2011.03.16 10:17

brunette 조회 수:2605

(미라 로베 저, 박혜선 그림, 크레용하우스, 2001년)
 

 

1913년에 태어난 독일 할머니 미라 로베가 지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제가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하는 초등학교 독서인증제 덕분입니다. 학년별로 권장도서목록이 좍 있고 학기 동안 스티커 나눠줘가며 책을 거의 강제적으로 읽게 한 다음 학기말에는 망할 독서퀴즈 따위를 치뤄서 1등도 뽑고 하는 그 어처구니없는 행사 말입니다. 저희 아이는 한 반에 아홉 명밖에 되지 않는 바닷가 시골학교에 다녔지만 그 역시 공립학교인지라 이런 재미없는 일들도 어김없이 다 벌어졌는데요, 그러든가 말든가 저는 이런 일엔 도통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난 겨울방학을 앞두고 아이의 알림장에 "다음주 독서골든벨. 4학년 필독도서 10권에서 출제됨" 이라는 고지가 매일매일 적히는 거에요. 한 5일째 되던 날에는 4학년이 읽어야한다는 그놈의 필독도서들이 대체 무어냐 싶은 호기심이 들어서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학년 초부터 저와는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시던 선생님께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하시며 아이가 지난번 결석 때 못 읽은 2권을 빼고는 모두 읽었음을 몇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아이가 학교에서 읽고있는 책들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그 목록을 받아서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빠트렸다는 그 2권의 책 제목을 황급히 불러주시고는 전화통화를 마치셨습니다. 그 2권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책, [내 친구에게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체육수업을 위해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좀 느지막이 탈의실에 도착한 율리아와 자비네는 하인리히라는 아이의 벗은 몸에서 심한 매질 자국과 푸른 멍들을 보게 됩니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부모 밑에서 한번도 매맞지 않고 자라온 율리아는 충격을 받습니다. 아이를 때리는 부모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율리아보다는 좀더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난 자비네는 아이란 부모에게 속해 있으므로 가끔 맞을 수도 있으며, 살짝 빰맞는 수준의 매라면 오히려 아이의 나쁜 점을 고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율리아와 자비네의 대화를 읽고는 완전히 이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율리아의 견해는 올바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지지할만한 원칙이지만 이 원칙이 실제로 지켜지는 가정은 지극히 드물죠. 물리적 폭력이 어느 정도 거세된 가정에서 자행되는 언어적/심리적 폭력을 목격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비네의 견해는 누구라도 입 밖에 내어 인정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많은 가정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이 겪는 상황이구요. 학대당하는 아이를 두고 벌이는 율리아와 자비네의 언쟁은, 대략적으로 선량할 보통 부모들의 마음 속에서 종종 벌어지는 논쟁이기도 한 거죠. 

 

율리아는 집에 와서 부모님께 그 일을 말씀드리지만, 부모님은 친구의 불행에 공감하는 네 따뜻한 마음씨는 갸륵하나, 충분한 증거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며 참견하지 말라고 합니다. 평소 존경하고 믿어왔던 우리 부모님이 맞는가 싶습니다. 정의로운 분들인줄 알았는데,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다음에는 담임선생님께 도움을 청해봅니다. 은근슬쩍 하인리히의 몸에 난 상처들을 언급하시는 걸 보니 다행히 선생님도 그 끔찍한 사실을 인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율리아는 한가닥 희망을 품고 선생님께 갑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선생님도 문제를 회피하시며 어쩔 도리가 없다고만 하십니다. 사실 담임선생님은 율리아보다 먼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오다가 교장한테 깨지고 오는 길이었거든요. 선생님은 하인리히의 엄마를 학교에 불러 상담을 시도하지만, 하인리히 못지않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한 이 부인은 선생의 도움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하인리히 역시 자신에 대한 율리아의 관심을 거칠게 밀쳐내며 완강한 방어벽을 두릅니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맞은 적이 없으며 그저 계단에서 굴렀을 뿐이라고 일축하지요. 율리아는 이 일로 언쟁을 벌이다가 단짝 친구인 자비네와도 사이가 멀어지고, 부모님과 담임선생님께도 거리감을 느끼며, 무엇보다 폭력을 당하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전혀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 합니다. 얼떨결에 하인리히의 아파트 앞까지 찾아간 율리아는 동네 노인으로부터 하인리히가 금요일마다 자기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맞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절망합니다.

 

모두가 무력감에 빠져있을 때, 작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소풍날 어른들 말씀 안 듣고 밉살스럽게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앉아 있던 하인리히가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죠. 충격과 고통 속에서 하인리히는 율리아에게 그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맙니다. 자신이 새아버지에게 맞고 산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자신은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외갓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도 하지요. 이제 됐다고 생각한 율리아는 부모님과 선생님을 다시금 찾아가지만, 몸을 어느 정도 추스린 하인리히는 다시 거칠고 차가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자신의 고백을 철회하고, 율리아를 헛소리해대는 아이로 몰아세웁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아무리 안타까워도 도와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율리아는 마지막 희망인 하인리히의 외갓댁을 엄마의 도움을 받아 방문합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자 독자인 책들에서는 대부분 현실이 치밀하게 묘사되기보다는 어린이에게 부과된 고통을 어떻게든 해소해주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어렵사리 리얼리티를 확보하였다해도 대충 이 정도 선에서, -가령 따스한 외조부모님이 상처입은 아이를 맞아준다는 식으로-, 마무리 되지 싶습니다. 이 책의 작가 미라 로베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지 않고 조금 더 나아갔습니다. 하인리히의 외할아버지는 병환으로 쓰러지셨고, 외할머니는 남편의 병간호와 다른 손주들 두 명의 양육을 이미 떠맡고 있는 상태라 도저히 하인리히를 돌볼 여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한 외할머니는 어린 시절의 하인리히를 사랑스럽게 기억하고, 폭력적인 남자와 가정을 꾸린 자신의 딸과 손자 하인리히의 안위를 염려하긴 하지만 이미 당신의 삶만으로도 충분히 버겁습니다. 거칠대로 거칠어진 손자를 자신의 집에 받아들이는 것에 할머니는 두려움마저 느낍니다. 하인리히를 폭력으로부터 어떻게든 구해내고 싶었던 율리아는 하인리히의 외갓집이 그 해답이기를 몹시 바랬지만, 이제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작가라면, 아니 율리아의 부모나 담임이라면, 혹은 율리아 자신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을 저는 제 자신에게 수십 번 던져보았지만,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책 말미에서 담담하게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현실은 갑갑하고 슬프지요. 이런 류의 문제란 '해답'이란 게 설령 있다할 지라도 태생적으로 슬픈 결말을 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비참하지도 않게, 현실을 가능한 한 정직하게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노력하는 것 같아서 작가분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그리고 주변 어른들을 이중성과 선의를 모두 가진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도 좋았구요. 이 작가의 다른 동화책들도 구할 수 있는 대로 다 읽어볼 작정입니다. 혐오하던 독서인증제로 인해 마음에 드는 작가를 알게 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지요. 제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그 후로 4학년 도서목록을 친히 타이핑하셔서 제게 건네주셨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한 권 한 권 읽어볼 요량입니다. 이 책으로 공교육에서 실시하는 각종 행사들에 대한 제 거부감이 조금은 누그러진 것도 같습니다. 

 

그외
-아이들을 체벌하는 경우 우리나라에서 엉덩이나 종아리를 때리듯이 유럽에서는 종종 뺨을 때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인지 궁금하네요.
-1913년에 태어나 1995년에 돌아가신 작가입니다. 아마 요즘의 독일이 배경이었다면 바로 신고 들어가고 아이는 시설이나 대리부모에게 맡겨지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 또한 속 편한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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