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3 23:30
얼마 전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포크 호러의 황홀한 역사]를 온라인으로 보면서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수많은 호러 영화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어제 본 [악마의 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로빈 에스트리지가 필립 로레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Day of the Arrow]가 원작입니다. 제작 중에는
제목이 [13]이었는데 나중에 [악마의 눈]으로 바뀌었지요. 고생이 많았던 영화입니다. 원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던
킴 노박은 영화를 3분의 2 정도를 찍은 뒤 낙마 부상 때문에 데보라 커로 교체되었습니다. 원래 감독이었던 마이클
앤더슨도 J. 리 톰슨으로 바뀌었고 시드니 J. 퓨리와 아서 힐러도 몇 장면을 찍었다고 해요. 간신히 찍은 영화는
한동안 창고에 박혀 있다가 뒤늦게 개봉되었지만 흥행엔 실패했고 잊혔습니다. 그 동안 조연으로 나왔던
샤론 테이트와 데이비드 헤밍즈는 스타가 됐죠. 그게 흥행에 대단한 도움은 안 되었지만.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입니다. 배우들은 대부분 영국 사람들이고 텍사스 출신인 샤론 테이트도 프랑스어 억양
대신 영국 억양을 익혀야 했지만요. 하긴 데보라 커와 데이비드 니븐은 이전에 같이 [슬픔이여 안녕]을 찍은
적도 있지요.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카트린과 필립이라는 부부를 연기합니다. 파리의 호사스러운 저택에서 애
둘을 키우며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필립의 고향 벨레낙에서 연락이 옵니다.
필립은 고향으로 떠나고 걱정이 된 카트린과 아이들은 남편을 찾아 가요.
당연히 벨레낙은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곳입니다. 두건을 쓴 수도승 복장의 사람들이 이상한 예식을
올리고 있고 수상쩍은 남자가 활을 들고 다녀요. 그 남자의 동생이라는 여자도 만만치 않게 무섭고요.
얼떨결에 아마추어 탐정이 된 카트린은 이 마을 지주들이 모두 수상쩍은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고
남편이 그 다음 차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을의 포도원은 몇 년째 가뭄으로 고생
중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얼마 없지 않습니까? 단지 지주들도
이걸 당연하게 여기느냐가 문제인데... 이게 이 이야기에 맛을 더해주죠. 게다가 카트린과
필립에겐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공포는 상당히 서구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고대의 종교를 믿는 이교도라는 게 무섭다는 것이죠. 사실 지금의 기독교 문화 상당 부분이
실제로 다른 종교에서 온 것이니,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은근슬쩍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요. 이건 평화롭게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이들 이교도들을 의태로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긴 인간 비슷한 짐승처럼 오싹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게 포크 호러의 본질이기도
할 텐데요.
아무래도 [위커맨]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영화지요. 그리고 여러 모로 [위커맨]이 더 재미있는
영화이긴 합니다. 이 영화는 일단 [위커맨]보다 몇 년 앞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영화로 기록될
거고요. 하지만 그 자체로 매력이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일단 주제가 비슷하다고 했지만
희생자를 다루는 방식 같은 게 전혀 다르고, 이 태도가 영화에 꽤 진중한 멋을 부여하거든요.
그리고 보다 보면 '지주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 정도 의무는 져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죠.
(23/08/13)
★★★
기타등등
낙마 부상 때문에 킴 노박이 그만 두었다는 건 공식적인 설명이고 데이비드 헤밍즈에 따르면 킴 노박이 제작자와 심하게
다투고 떠났답니다.
감독:
J. Lee Thompson,
배우: Deborah Kerr, David Niven, Donald Pleasence, Sharon Tate, David Hemmings, Emlyn Williams, Flora Robson, Edward Mulhare,
다른 제목: 13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6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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