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헤매다

2012.07.01 05:11

걍태공 조회 수:3040

배낭여행의 추억을 살려, 씩씩하게도 외곽의 호텔에서부터 파리의 도심 한가운데 있는 오르세 미술관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다지 덥지 않은 맑은 날씨에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와 산책하듯 걷기엔 딱 좋은 날이라 기분이 좋았죠. 처음에는요.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면서 급속도로 체력이 감소하는 것을 느끼면서, 새삼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 더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래도 도심에 가까와지면서 어슬렁거리는 관광객들도 많이 보이고, 왠지 친숙한 지명들도 늘어나면서 그나마 기운을 회복했습니다. 고작 이틀 사이에 프랑스 음식에도 살짝 질려버린지라, 베트남 쌀국수를 먹기로 하고 옐프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몽빠르나스에 도착한 것은 호텔에서 출발한 지 두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축제의 한가운데 휩쓸려 버렸죠.


근데 무슨 축제길래 처음부터 보이는 풍경이 오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분홍색 콘돔 풍선?  콘돔 풍선을 쳐다보면서 당황하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무지개색 딱지를 옷깃에 달아주고 지나가? 콘돔과 무지개 딱지가 결합되면서 뭔가 생각나려 하는데, 쭉쭉빵빵 언니들이 거의 헐벗은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게 보여. 그런데 다시 쳐다보니까 쭉쭉빵빵 언니들이 아니라, 쭉쭉빵빵 언니처럼 차려입은 오빠들이네?


그제서야 말로만 듣던 게이 프라이드 행렬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역시 파리 게이 프라이드가 개막하는 순간에 기가 막히게 시간을 맞춰 도착한 것이더군요. 몽빠르나스에서 시작해서 바스티유까지 행진을 한다고 합니다. 게이는 아니지만 왠지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지는 흥겨운 축제였습니다.


퍼레이드를 빠져나와 삼십분 정도를 더 걸어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했더니, 수많은 인파가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더군요. 오랜만에 다시 찾은 오르세 미술관이지만, 줄서기 무척 싫어하는 성미에다 체력이 120% 바닥난 상황에서 기다리고 싶은 생각은 도저히 나지 않더군요. 프랑스어를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드가 특별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미술관 앞에서 입맛만 다시다가 세느강을 따라 에펠탑까지 가보기로 하고 돌아섰습니다. 기억 속의 세느강은 탄천같은 도랑이었는데, 생각보다 강이 꽤 넓더군요. 세느강을 여유롭게 흘러가는 유람선을 보면서, 해질무렵 저걸 꼭 타보라고 하셨던 분의 댓글을 떠올렸습니다.


강변을 따라 걷다 에펠탑의 꼭대기가 보이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더군요. 분명히 작년 말 정도에 에펠탑이 폭파되는 장면을 TV에서 봤었다는 것을요. 한참을 고민했어요. 그러다 그게 TV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콜오브듀티 게임 하다가 본 장면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체력이 바닥나다보니 정신마저 오락가락합니다. 그래서 파리를 걸어서 헤매는 것은 거기서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체력이 떨어져도 오기로 끝까지 버티는 것 따위 더이상 못하겠더라구요. ㅠㅠ


몬스터 하나 사서 마시고, 호텔 앞의 일식집에서 더럽게 맛없는 스시 한접시를 저녁으로 먹고 들어왔더니 좀 살 것 같습니다.  토끼님 드리려고 길가다가 발견한 Le Norte 라는 제과점의 마카롱 사진을 찍어놨는데, 주소를 안주셔서 어떻게 보내드려야할지 모르겠군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914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83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8018
74248 창의성도 없고 재미도 없는 단순 반복 노동 하시는 분 계십니까 [7] military look 2012.07.01 4095
74247 백설공주 후기, 릴리 콜린스가 필 콜린스 딸? [5] 등짝을보자 2012.07.01 3321
74246 [윈앰방송] 재즈 ZORN 2012.07.01 808
74245 [100권] 추락 - 존 쿳시 // 자신을 직면한다는 것.. [2] being 2012.07.01 2266
74244 앞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서울아트시네마에 가야해요 [1] military look 2012.07.01 1982
74243 윤석호pd 봄의왈츠, 여름향기 보신분께 질문글. [9] 눈이내리면 2012.07.01 2708
» 파리를 헤매다 [12] 걍태공 2012.07.01 3040
74241 [바낭] 고백 [5] 소소가가 2012.07.01 2300
74240 [듀나In] 9월 유럽 여행, 일정 질문 [5] espiritu 2012.07.01 1678
74239 블앤소 포스터를 보고... 닥호 2012.07.01 1571
74238 몇몇 드라마 연장 + 상반기 한국 드라마들에 대한 단상 + 역대 최고의 걸그룹 [10] 화려한해리포터™ 2012.07.01 3929
74237 이영진 인터뷰랑 사진 [3] 행인1 2012.07.01 3034
74236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단상 (스포일러 가득) 슈크림 2012.07.01 1755
74235 탐정님 수지,각자마다 에로스의 원류가 다른 이유 [1] 가끔영화 2012.07.01 1710
74234 인수대비 스페셜 [2] 달빛처럼 2012.07.01 2088
74233 슈퍼주니어 Sexy, Free & Single [7] 감동 2012.07.01 2292
74232 크리스탈 시구 사진 [5] 가끔영화 2012.07.01 4361
74231 [바낭] 심심한 일요일 낮. 게시판은 대체로 조용하고 맑습니다만.. 그래요. 후반전 시작!! [8] 異人 2012.07.01 1543
74230 부천역 갔다가 [4] 메피스토 2012.07.01 2324
74229 할머니 괴롭힌 미국 중학생들 [6] 사과식초 2012.07.01 405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