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추락 - 존 쿳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존 쿳시의 걸작(?) 중 한 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에 소개가 된 것을 듣고 읽게 되었습니다. 


대강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수로 재직 중인 주인공은, 추문에 휩싸여 딸이 살고 있는 지방으로 낙향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건이 터집니다. 


저는 '나이 든 남자의 성욕'이 어린 나이의 (약한 상태의) 여자를 대상으로 화려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불편합니다. 개인적 경험에 기인한 본능적 혐오감입니다. 또, 어떤 행위의 과보를, 아버지나 남자들이 아니라 아내나, 특히 주로 딸이 성적 징벌 형태로 받는 이야기도 싫습니다. 뭐, 그만큼 현실에서 되풀이 되는 이야기이고, 독자들도 크게 불편해하니 소설에 더 자주 등장하겠지요. 다만 남자가 불편해하는 지점과, 여자가 불편해 하는 지점이 분명 다를 텐데, 이런 소설은 딱 읽어도 '남자 독자의 불편함'을 주로 염두에 두고 쓰인 것 같아, 여자 독자로서 소외감이 듭니다. 나는 어떻게 느껴야 할까? 


하여튼!! 이 소설은 제가 안 좋아하는 두 가지를 고루 갖췄습니다. 그래도 대가가 쓴 책이어서인지 흡인력은 대단해서, 성을 버럭버럭 내면서도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그나마 배경에 '남아프리카의 역사'라는 큰 틀이 있어서 그걸 부여잡고 읽어 나간 것 같아요. 이런 거시적인 역사 모순은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도, 피해자의 고통을 같이 느끼다 겪게 되는 고통과 비교하면 훨씬 견딜만합니다. 쿳시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점은, 저런 거시적 역사 문제의 끔찍함을, 역사의 무게를 온 몸에 지고 점점 힘을 빼앗기는 피해자의 고통과 종속, 그리고 '그 자리에 없었던' 방관자, 하지만 또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백인이자 아버지이자 남자'인 교수의 추락을 통해 기가 막히게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아, 문장이 정말 출중합니다. 번역 된 글인데도 느끼겠어요. 짧은데 깊고, 경제적인데 풍성하고, 아주 아름답습니다. 짧게 나마 영어로 읽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킨들 버전이 없어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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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서 모여서 만난 자기치유 글쓰기를 3회차 했어요. 이끌어주는 이도 없이 전문가도 없이 그냥 하고픈 사람들이 모여서 꼬물꼬물 자기 이야기 써서 읽고 나누는 식의 모임이에요.


오늘, 말로도 글로도 정확히 묘사해 본 적이 없었던 이야기를 생전 처음 말해봤어요. 늘 생각하는데, 저는 평소에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아니, 잡생각만 슝슝 날아다니고 정리된 생각은 거의 안 하는 것 같아요. 제 머리가 좋지 않다는 아쉬움이 상당한데, 이런 면 때문이기도 해요. 그런데 글을 쓰거나 말을 하거나 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가 조금씩 되어요. 그래서 저는 생각하려면 글을 써야 하는 것 같아요. (생각 정리가 끝난 후 말을 할 수 있거나 글을 쓸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하여튼-_-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그 때 그 일을 말하면서 생각 정리가 좀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어떤 응어리가 살짝이나마 풀린 느낌이었어요. 그 일에 대해 직면은 꽤 했다고 생각 했는데, 구체적으로 묘사해 본 적은 없었거든요 지금까지는. 타인에게든 혼자 있을 때든. 그런데 그 직면이라는게, 정말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거군.. 싶더라고요. 추상적으로 뭉개서 이야기하면 안 되었던 거에요. 그 사건과 지금 내 상황사이를 연결하는 수 많은, 반복되는 생각, 감정, 행동패턴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면서..아주 생생하고, 언어적으로 명확히 정리하면서 차근차근..  아주 조금 하다 말았는데, 그럼에도 이게 상당히 효과가 있어서, 아주 놀라고 있어요. 한 번 가지고는 안 되겠지, 여러 번 해 봐야겠지, 어쩌면 평생 계속 해야 할지도..싶기도 하고요. 평생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그렇게 정리 된 생각 중 하나.. 자기 욕망에, 또 감정에 솔직한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떠오르는 그것들을 되는 대로 표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욕망이나 감정을 수치스러워 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우선그냥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말이 쉽지 이게 잘은 안 되지만 -_-;; 하여튼 고상한 가치판단을 얹기 전에 그 감정이나 그 욕망을 있는 그대로 확실하게 봐주고  인정하고 나면, 나중에 컨트롤을 해야 할 때도 훨씬 쉬워져요. 또 컨트롤 안 해도 안 좋은 것이라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긍정적인 활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확실히 욕망이나 거친 감정이 없으면 삶의 추진력이 사라져요. 머리로 이성으로 아무리 짱구를 굴려봤자, 결정적인 순간에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케 하는 것은 감정인지라. 그게 억압되어 있으니 계속 정체 되더라고요. 제가 그랬었어요. 다른 이유도 있지만..


책에서 수도 없이 읽어왔던 이 간단한 진리를, 오늘 다시 몸으로 한 번 알았어요. '감정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 주어라.' 여러 번 더 몸으로 경험하고 나면, 진짜 내 '앎'이 되겠지. 저도 하루키(랑 비교하면 우습지만;;)처럼 몸으로 사는 종류의 사람인가봐요. 머리로 알아봤자 인생에 거의 도움이 안 되는..


지금부터 열심히 내 욕망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지. (그런데 과활성화된 식욕도 살펴야 하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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