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읽는 시

2012.11.07 02:08

난데없이낙타를 조회 수:1563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
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
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
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
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혼
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한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5


  이렇게 또 첫된 희망은 밤이 되면 젖은 빨래처럼
나부끼고 머리털이 곤두서도록 잠이 오지 않는다 머
리맡에는 히말라야 기슭에서 건너온 진흑으로 만든
부처, 그리고 대서양 연안 에트레타 바닷가에서 주워
온 해골 닮은 돌, 오, 살을 떠낸 물고기 뼈 같은 잠,
너무 가벼워 내 눈엔 앉지 않는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꽃들은 등을 세우고 29


  창문 두 쪽을 가득 채운 나무, 저렇게 많은 잎과 가
지들이 흔들리자면 아름드리 둥치는 얼마나 비틀리겠
는가 큰 것들은 다름아닌 수많은 작은 것들의 비애의
합침 더 세게 흔들리다보면 몸통이 찢어지고 빠개질
것 같아도 질긴 비애의 세월에 겹겹이 둘러싸인 큰
나무는 밤새도록 정정하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32


  말라붙은 샘 두 개, 그 주위로 가시덤불, 검붉은 가
파른 길들 엇갈리고 아직 안 부서지고 남은 언덕 구
개, 희끗희끗 껍질 벗겨진 나무, 높은 가지 흰 꽃 세우
는 나무가 아니라 진물도 말라붙은 늙은 나무-그러
나 믿음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여전히 믿음이다

높은 나무 흰 꼿들은 등을 세우고 35


--

오랜만에 이성복 시집을 꺼내봤습니다. 견디려면 어떻게든 믿어야하는 밤, 큰 나무는 밤새도록 정정할 거라고 믿어야하는 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음에 대해 질문해야하는 밤입니다. 제 믿음이 가벼워 제 눈에 앉지 않았으면 하는, 못난 밤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97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67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836
126576 매드맥스 시리즈 그냥 잡담 new 돌도끼 2024.06.28 28
126575 [단독] "그냥 20억 불러 버릴까?"…손웅정 사건, 협상 녹취록 입수 new daviddain 2024.06.28 81
126574 I, Claudius 1회를 6분 틀었는데 new daviddain 2024.06.28 27
126573 이세계 수어사이드 스쿼드 1~3화 DAIN 2024.06.28 116
126572 더 납작 엎드릴게요 예고편 상수 2024.06.28 81
126571 [넷플릭스바낭] 호기심이 고양이를 막... '여귀교: 저주를 부르는 게임' 잡담입니다 로이배티 2024.06.27 97
126570 제로투 추는 한국인 catgotmy 2024.06.27 103
126569 프레임드 #839 [2] update Lunagazer 2024.06.27 47
126568 인사이드 아웃 2 카탈루냐 어 예고편 유튜브 자동번역/세계 여러 말로 옯긴 감정이들 daviddain 2024.06.27 36
126567 뉴진스 - 도쿄돔 팬미팅 - 하니 솔로 -푸른 산호초- 러브레터- 버블시대= 참좋은 시절 [6] soboo 2024.06.27 269
126566 Bill Cobbs 1934 - 2024 R.I.P. 조성용 2024.06.27 69
126565 콰이어트플레이스...상영시작 1분만에 기대를 내려놓은 영화 여은성 2024.06.27 264
126564 스페인/영국 언론에 보도된 손웅정 아동학대 [1] daviddain 2024.06.26 278
126563 Love is an open door 우크라이나어 catgotmy 2024.06.26 37
126562 전도연, 지창욱, 임지연 주연 오승욱 감독 리볼버 예고편(길복순 VS 박연진 VS 동해야) 상수 2024.06.26 235
126561 프레임드 #838 [6] Lunagazer 2024.06.26 97
126560 [단독] 'SON아카데미' 폭행 코치는 손흥민 친형…"피멍 들자 웃으며 잘못 때렸다 해" [2] daviddain 2024.06.26 315
126559 손웅정 감독 아동학대 혐의 피소…"고소인 주장과 달라" 반박/손웅정 “합의금 수억원 요구” VS 피해 아동 쪽 “2차 가해” [단독] 손웅정 고소 학부모 “지옥 같은 시간…피해자 더 없길” daviddain 2024.06.26 165
126558 칼리굴라 완전판 예고편/시리즈온 무료 ㅡ 지옥의 묵시록 파이널 컷 7.4.까지 [8] daviddain 2024.06.26 180
126557 We Don't Talk About Bruno - 헝가리어 catgotmy 2024.06.26 3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