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여자

2010.07.06 23:49

차가운 달 조회 수:3109




어제 술을 마시고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잤어요.

아니, 그렇게 늦은 건 아니었는데 괜히 빌빌거리다 평소보다 15분 늦게 집을 나섰죠.


결국 회사에는 지각을 했어요.

지금까지는 늘 일찍 와서 듀게도 좀 들락거리고 그랬는데 말이죠.


버스 정류장에는 바람이 불고 있더군요.

왠지 들판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곳에 있거든요.

늦겠다, 늦겠어, 이거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들판 저쪽에서 한 여자가 걸어오는 모습을 봤어요.

하늘색 상의에 남색 바지를 입은 여자였죠.


버스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쭉 지켜봤어요.

흐릿하던 얼굴이 점점 또렷해질 때까지.

단발머리라고 해야 하나,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의 머리였어요.

그렇게 긴 머리는 아니었죠.


남자들이 한 여자를 파악하기 위해서 묻는 질문이 모두 '예쁘냐?'로 귀결되는 그런 인터넷 유머도 있긴 하지만,

저는 예쁜 여자보다는 좀 이상하게 생긴 여자를 좋아해요.

이상하게 생긴 얼굴이 어떤 얼굴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설명하기 힘드네요.


아무튼 그 여자는 좀 이상하게 생겼더군요.

맥주 CF에 흔히 나오는 그런 여자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예쁜 얼굴은 아니었어요.


두 대의 버스가 지나갔는데 그 여자는 타지 않더군요.

물론 저도 타지 않았죠.

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서 있었어요.


남색 바지 속으로 상의를 집어넣었는데 벨트를 매지 않았더군요.

그런데도 바지는 조금 여유가 있는 편이었어요.

아, 뭐 그렇게 나쁜 패션이라고 할 수는 없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괜찮았거든요.


우리는 같이 버스를 탔죠.

그 여자가 먼저 타고 제가 늦게 탔는데

버스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어요.

여자는 카드를 찍은 다음 운전석 옆의 손잡이를 잡고 섰어요.

왠지 뒤쪽에 서 있기가 싫어서 저는 안쪽으로 들어갔죠.


다음 정류장에서부터 버스 기사는 뒷문을 열기 시작했어요.

마치 군대의 교관이 그러는 것처럼 앞유리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멋진 수신호를 보냈죠.

야, 너네, 뒤로 타.

그렇게 말이에요.


아무튼 남색 바지를 입은 여자와 저는 별로 방해받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어요.

그 여자는 비스듬히 등을 돌린 상태였기 때문에 뒷모습밖에 안 보였죠.

그런데 문득 바라본 룸미러에 여자의 얼굴이 있더군요.

손잡이를 꼭 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어요.


저는 거울 속에 비친 그 얼굴을 슬쩍슬쩍 바라보았어요.

확실히 이상하게 생긴 여자더군요.

그 입술, 루즈를 연하게 바른 건지 안 바른 건지 알 수 없는 그 입술,

위로 두툼하게 솟아올라 그 여자의 인상을 크게 좌우하고 있었죠.

미안한 말이지만, 인간의 진화 과정을 그린 그림에 나오는 선조들의 입술을 닮았어요.


그리고 콧대는 꼿꼿하고 길게 뻗었는데 뭐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어요.

눈을 감고 있으니까 처음 봤던 인상보다는 좀 나아 보이더라구요.

왜, 잠든 사람은 다 평화로워 보인다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저는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그러다 여자가 문득 눈을 뜨더군요.

얼른 눈을 돌리면 더 이상할 것 같아서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울의 바깥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어요.

눈을 뜬 여자의 얼굴도 왠지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이상한 얼굴이었는데 버스에서 내릴 무렵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죠.

물론 미학적으로 보면 이상한 얼굴이 맞을 거예요.

하지만 저한테는 상관없었어요.


우리는 같은 버스 정류장에 내렸죠.

거기 지하철역이 있었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여자를 볼 수 없었어요.


글쎄요, 내일부터는 매일 지각을 할까 생각 중이에요.

별로 다른 뜻은 없고...

아, 그냥 좀 느긋하게 살고 싶어서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14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17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494
124560 프레임드 #592 [2] Lunagazer 2023.10.24 80
124559 (정치바낭)공동정권,,,괴이합니다. [7] 왜냐하면 2023.10.24 624
124558 곽재식 단편선 표지 디자이너님은 못 찾았지만 텀블벅을 오픈했습니다 [3] 쑤우 2023.10.24 283
124557 아스달 연대기- 아라문의 검 시즌 2가 끝났습니다. [3] 애니하우 2023.10.24 357
124556 코엔자임 q10에 대해 catgotmy 2023.10.23 206
124555 추억의 야구선수 화보 daviddain 2023.10.23 183
124554 (펌) 외신 기자의 이태원 'CRUSH'를 본 소감 [6] 사막여우 2023.10.23 770
124553 [요가] 중에서 특별한 감탄 [5] thoma 2023.10.23 229
124552 프레임드 #591 [2] Lunagazer 2023.10.23 76
124551 사진이 작지만 많이 아는데 얼른 이름은 한사람만 가끔영화 2023.10.23 137
124550 잡담 -코 훌쩍이는 소리가 울리는 공유오피스에서(가을영화 이야기) [2] 상수 2023.10.23 166
124549 지난 일요일 팔레스타인 연대시위 다녀왔습니다 [11] Sonny 2023.10.23 471
124548 플라워 킬링 문/준플 2차전 [10] daviddain 2023.10.23 242
124547 [넷플릭스바낭]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비교적 짧은 잡담 [20] 로이배티 2023.10.23 513
124546 잡담, 애프터눈티와 자유 여은성 2023.10.22 222
124545 프레임드 #590 [2] Lunagazer 2023.10.22 80
124544 생각은 실제와 얼마나 부합하는가(이론에는 한계가 있지, 누구나 링 위에 오르기 전에는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아가리를 한대 얻어맞기 전까지는) [2] 상수 2023.10.22 317
124543 이스트반 사보의 중유럽 삼부작 ‘메피스토’ ‘레들 대령’ ‘하누센’ [6] ally 2023.10.22 226
124542 ENTJ에 대해 catgotmy 2023.10.22 200
124541 장르소설 영어 [3] catgotmy 2023.10.22 19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