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권력, 지적의 권력.

2010.06.05 01:31

keira 조회 수:5331

 지방 출신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몇 년 사이에 '사투리'를 싹 고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대부분 전라도나 제주도 사람들이, 그리고 여성들이 빨리 고칩니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빨리 고친다는 이야기이지요. 경상도 출신의 남성에게 사회 생활에 지장 있을 수 있으니 '사투리'를 교정하라는 이야기 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전라남도 출신의 여성으로 거의 7~8년을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소위 '사투리'를 교정하지 못했지요. 일단  어휘를 표준말에서 벗어난 걸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의사 소통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귀가 밝은 편이 못 되어서 리스닝이 잘 안 되는 편이기도 하지만 제게는 서울말과 전남말의 차이가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고쳐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겠지요.

 

하지만 학교에서 교수님께도 '사투리'를 교정하라는 말을 들어 봤고, 심지어 100% 전남 사람인 부모님께도 그런 말을 들어봤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제게 악의가 있어서 그렇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게 제게 유리하니까 충고해주는 거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는 것과 감정적인 반응은 다른 문제입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제 말을 좀 듣다가 항상 물어옵니다. 

- 집이 지방인가요? 어디예요?
- 전남이에요.
- 어쩐지 말투가 좀 다르게 느껴진다 했어요.

 

아마 다르겠지요. 그런데 그걸 왜 꼭 집어서 지적하는 건가요? 제게도 경상도 말, 서울말, 충청도 말, 제주도 말이 다 다르게 들립니다. 하지만 전 그걸 지적하지 않아요. 의사소통이 되는데 상대방이 억양이나 강세가 약간 다른 말을 사용하는 게 무슨 상관일까요? 누가 그들에게 제 말투에 대해 지적할 권력을 준 겁니까?

 

전라도 사람의 입장에서도 다른 지역의 말투에 대해 부정적인 평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 합니다. 그게 무례하다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지난 10년간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전라도의 지위가 조금씩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적이 무례하다는 합의가 올 날은 아직 요원한 모양이군요.

 

말투와 '사투리'의 문제에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권력 문제, 전라도와 같이 차별받아온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의 권력 문제, 남성과 여성의 권력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한국 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계층이고요. 제 말투에 대한 지적에 익숙해져야 하고, 익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별개로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간 들어온 지적질들이 오버랩되면서 지금 분노까지 치미는군요.
 
완전 오버라는 반응이 나올 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저는 지금 지난 97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왜 어른들이 개표 방송을 보면서 춤을 추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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