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드디어 봤어요.

2010.06.09 23:14

bunnylee 조회 수:3837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일부러 리뷰도 안보다가 어떤 분이 여기 나오는 시가 노무현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인 것 같다고 해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시 부분만 봤었어요. 솔직히 그다지 잘 쓴 시같지 않았고, 노무현 대통령하고 별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알겠네요. 그 시가 대단한 수작이 아닌 것은 여전하지만(이창동의 의도였겠지요), 시라고는 써본 적 없는 65세의 여성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15세(?)의 여성에 대한 공감과 애도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던져가면서 쓴 시라는 설정 속에서는 울림이 굉장히 크더군요. 특히 시의 중간에 화자가 바뀐다는 것을 글로만 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지 이해가 잘 안가는 느낌이었는데, 영화로 보니까, 너무나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영제가 "poem"이 아니라 "poetry"라는 것은 좀 의외였어요. 이 영화는 "시"라는 문학장르가 아니라,  "그 시"에 대한 영화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느꼈거든요. 영화는 "시"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사물을 진실로 본다"거나, "솔직하게 표현한다"거나 "아름다움"이라거나 하는 교과서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시에 대한 담론들이 계속 나오고,  김용탁 시인의 후배는 술자리에서 그걸 슬쩍 비웃기도 하지요. 미자는 "시"에 대한 그런 담론들을 고지식하게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서 시를 쓰려고 애를 쓰지만 시를 쓸 수가 없었죠. 그러나 결국 진실과 정의를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던지기로 작정하자 "그 시"가 저절로 토해져 나왔죠. 저는 이창동 감독이 미자의 "그 시"를 문단에서 유통되어지는 제도권의 "시"와 약간은 대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시 낭송회에 나와서 음담패설이나 늘어놓던 사람이 뜻 밖에도 사실은 정말 진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어서 미자가 의아해 하는 장면이나,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고백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시 낭송회의 "시"들보다 더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장면 등이 이창동의 "시" 또는 "문학" 더 나아가 "예술"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그 시(poem)"에 대한 것인지, "시(poetry)"에 대한 것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처럼도 느껴지네요. 둘 다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원제는 암튼간에 "시"이고요. 

 

영화를 보고 마음이 정화된다는 느낌을 받은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준 이창동 감독에게 감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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