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전주가 나오고 하니의 얼굴이 크게 띄워질 때 나는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이 영상을 같이 보던 친구에게 물어봤다. 이거 설마 마츠다 세이코야? 그 푸른 산호초야? 전주가 울려퍼지고 아~로 시작하는 가사를 하니가 부르는 순간 나는 경악했다. 하니가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를 부르고 있다니. 이건 너무나도 충격적인 선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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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가 Odoriko를 부르는 건 꽤나 멋진 선곡이다. 혜인이 플라스틱 러브를 부르는 건 혜인 본인을 통틀어 뉴진스란 그룹의 정체성을 더 아티스틱하게 만드는 근사한 선곡이다. 여기까지는 납득할 수 있다. 충격적인 건 하니가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를 부르는 것이다. 이 충격은 마츠다 세이코와 뉴진스의 하니를 동시에 아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흥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 아이돌이 한국 공연 와서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를 부른 것과 비슷하지 않냐고 한다. 이것은 한국인이, 일본인의 입장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인인 우리가 하니가 푸른 산호초를 부르며 등장했을 때 "일본인이 받은 충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츠다 세이코는 강수지로 치환되지 않는다.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을 한국인의 자리에 갖다놓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일본인의 자리에 가야한다. 나는 마츠다 세이코를 찬양하려는 것도 아니고 강수지를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은 배용준은 알아도, '욘사마'는 온전히 체감하기 어렵다. 특정 국가와 특정 문화권에 속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특정 인물이 전파하는 문화적 위력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는 뜻이다.

강수지를 먼저 설명해보자. 내가 유년기에 체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정말 인기가 많고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가수였지만 그렇다고 국민적 가수의 위용을 떨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최대 히트곡인 보라빛 향기는 당시 가요프로그램에서 한번도 1위를 하지 못했다. 당시 강수지는 호리호리한 외형을 가진 도회적 이미지를 가진 '신여성'에 조금 더 가까웠다. 그는 일본 진출을 했을 때 은하철도 999의 메텔 역할의 후보였다. 흐릿한 내 체감과 남아있는 정보들을 조합해보면 그렇다.


나는 마츠다 세이코를 일본의 80년대, 쇼와 시대에 체험한 사람은 아니라 당연하게도 그 당시의 마츠다 세이코에 대한 정확한 감상은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이미지와 아직도 회자되는 감흥을 종합해서 대조해볼 수는 있다. 마츠다 세이코가 가진 국민 여동생의 이미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카와이'한 이미지, 그리고 그가 세운 일본 음반 판매량이나 그의 이미지에서 파생된 수많은 유행 혹은 문화상품들로 미뤄짐작할 수 있는 위상의 잔재들이 있다. 한국인의 배용준과 일본인의 욘사마가 다른 존재이듯이, 일본인에게 마츠다 세이코는 한국인이 강수지라는 인물을 소환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렬하고 다른 식으로 애틋한 존재라는 것이다. 점선으로 그려진 인식의 공백에 다른 누군가를 데려와 채우는 것은 오해로 발전한다.


어떤 한국인들은 이번 공연을 통해 마츠다 세이코를 처음 알았을 것이고 나같은 한국인들은 지인의 추천이나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그를 접했을 것이다. 어떤 한국인은 몇십년 전부터 마츠다 세이코를 팬으로서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알고 있다는 것, 좋아한다는 것으로도 일본 현지인들이 느끼는 마츠다 세이코에 닿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마츠다 세이코를 향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얼마나 가까이, 익숙하게 인식하고 있는지의 문제다. 그를 그 당시 현재진행형으로 느꼈던 사람부터 본인들의 입이나 다른 매체로 구전되어온 마츠다 세이코가 가진 현지의 존재감이란 더 크고 진하지 않을까. 어딘가에서는 라디오에서, 혹은 만화 캐릭터로, 혹은 그를 따라한 후배 가수로, 그의 옛날 영상에서, 혹은 그를 소재로 한 다른 이야기에서 일본사람들에게는 마츠다 세이코란 부분이 채워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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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니의 푸른 산호초 무대를 단순한 오마쥬나 싱크로율이 높은 코스프레 이상의 것으로 기록해야 할 의무마저 느낀다. 왜냐하면 내가 제일 놀랍고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하니가 등장하고, 전주가 시작된 후 푸른 산호초의 도입부 가사인 '아아~'를 부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유튜브나 다른 매체에서도 발견되는 일본인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아주 많은 일본인들이 "선곡"이나 "프로듀서"를 이야기하며 그 충격적 감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니의 푸른 산호초 무대에는 두 존재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조우를 목격하는 듯한 충격이 있다. 이건 단순히 시간대의 문제가 아니라 영역의 문제다. 혜인이 커버한 플라스틱 러브는 1985년에 발매된 노래이고 하니가 커버한 푸른 산호초와 발매연도가 5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충격의 차원은 전혀 다르다. 이를테면, 하니의 푸른 산호초 커버에는 뉴진스의 cool with you 뮤직비디오에서 양조위를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다. 이건 단순한 활동장르의 차이나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두 존재가 명확히 구분된 영역에서 존재하는 걸 알고 무의식적으로 그 둘의 접점이 없을 것이라 여기는 상태에서 갑자기 그 예상을 파괴해버리는 어떤 조합의 문제다. (그렇기에 이걸 강수지의 사례로 치환하는 것도 적확하진 않다. 왜냐하면 이미 하니의 푸른 산호초를 보고 난 후에, 그건 어떤 일본인의 보라빛 향기~라는 식으로 예상가능한 범주의 문제로 환산하기 때문이다.)


마츠다 세이코는 '뉴진스가 커버할 수도 있는 일본 가수'의 인지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다. 사람들이 그 대상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대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자신으로 너무 잘 알려진 존재는 강력한 오리지널리티를 동반한다. 마츠다 세이코는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이고 그만의 노래 스타일이나 그가 세운 업적 때문에 오리지널리티가 강력한 가수다. 이런 존재를 따라한다는 건 원본과 대조되고 열화판 복제로 여겨질 위험이 대단히 크다. (일본의 남자 아이돌이 지드래곤의 착장을 따라하고 춤까지 추면서 그의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과연 쉽게 감동적일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하니가 푸른 산호초를 부르면서 등장할 때,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난 듯한 그런 느낌마저 준다. 원본과 인용이 훅 좁혀지면서 생기는 그 강렬한 충격, 두 존재가 퓨전을 한 듯한 그 감흥이란 무엇일까. 단지 옛날 노래를 귀엽게 부르는 뉴진스의 하니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시절의 마츠다 세이코가 다시 돌아온 듯한 그련 착각을 일으킨다. 마츠다 세이코를 그냥 알기만 하는 한국인인 나에게도 이런 충격이 전해지는데 마츠다 세이코를 생활의 영역에서 훨씬 더 깊이 접하고 있을 일본 현지인들에게는 이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30대 이상의 일본인 뉴진스 팬들에게 이 무대를 보는 것은 타임머신을 타는 것만큼 엄청난 향수와 감회를 일으켰을 것이다.


민희진의 특기는 노스텔지어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때 뉴진스가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실제 체험과 얼마나 맞닿아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A라는 미쟝센이나 소재가 일으키는 특정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지금 현 시대의 표현법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되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다. 민희진은 뉴진스의 데뷔 때부터 이걸 계속 건드리고 있다. Attention의 뮤직비디오나 멤버의 긴 생머리들이 일으키는 90년대의 느낌, Ditto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가공된 학창시절과 팬질의 기억, Bubble Gum이 일으키는 청소년기 여행에 대한 환상, 마이애미 베이스나 뉴잭스윙으로 계속 자극하는 20세기의 쿨함과 힙스러움. 그리고 이걸 팬미팅에서 멤버의 착장과 선곡으로 또 한번 건드리는 것이다. 프로듀서로서의 이 일관된 취향의 전술이, 자신만의 귀여운 매력을 완전히 겸비한 멤버를 만났을 때 어떤 일어나는가. 그것이 아마 이 하니의 푸른 산호초 '사건'일 것이다.


콕 집어서 말할 수 있다. 하니가 푸른 산호초를 선보인 팬미팅에서의 최초의 무대야말로 오로지 한번만 가능한 '특급반전'의 무대다. (하니가 영어권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는 걸 상기해본다면 더욱 더 그렇다) 이 노래를 커버하며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허를 완전히 찔러버리는, 그런 절묘한 무대다. 이 노래를 부르는 하니조차도 첫번째 무대의 그 충격을 다시 가지고 오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래된 팝 음악이 울려퍼지는 영화의 씬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꺼림칙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흘러간 시절의 고전팝음악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이 너무 완벽하게 세공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주 정교하고 정형화된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구현될 수 없다는, 우리의 본능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이 '불길함'을 자극한다. 

여기까지는 하나의 쉬운 공식이다. 그렇다면 이걸 뒤집었을 때, 오래된 팝 음악이 담고 잇는 아름다움이 거의 완벽하게 재현될 수 있다면 그 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게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감각은 하지만 이해능력이 그 현상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해와 감각의 거리만큼 꿈과 현실의 거리로 치환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가 그걸 다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 거리감을 '꿈 꾸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그 아스라한, 아련한 느낌이 바로 꿈의 질감이다. 나는 케이팝 아이돌의 공연을 보면서 Roy obinson의 In Dreams가 울려퍼지는 [블루 벨벳]의 환상적인 느낌을 받을 줄 몰랐다. 영어 단어인 mesmerize가 어떤 뜻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니의 푸른 산호초 무대영상을 예시로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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