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그레이스 (Alias Grace)

2017.12.02 12:19

겨자 조회 수:6672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그레이스 (Alias Grace)'를 보았습니다. Vulture에서는 이 작품이 센세이셔널하거나 음란하지 않으면 - 범죄자 혹은 창녀가 아니면 - 여성의 말에 관심조차 안주는 우리들 모두가 죄인임을 보여준다고 하네요. 센슈얼/섹슈얼한 젊은 여자에 대한 관음증 - 이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네요.

- 제게 있어 '그레이스'는 임신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레이스는 젊고 잘생긴 정신과 의사에게 세명 여성의 인생을 말해주지요. 그리고 그 여성들의 드레스를 찢어 퀼트 이불을 만든다. 메리 위트니의 드레스, 자기 자신의 정신병동 옷, 가정부 낸시 (피살자)의 드레스. 이 세 명의 페르소나가 곧 그레이스입니다. 메리 위트니는 그레이스의 다중 인격 중 하나라고 최면 상태 (혹은 가짜 최면 상태)에서 그레이스는 주장하죠. 그리고 그레이스는 가정부 낸시의 옷을 굳이 벗겨 입고 도망갑니다. 키니어 집안의 마나님 행세했던 그녀를 부러워라도 한 것처럼요.

이 중 두 명은 죽고 그레이스는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무엇이 그레이스를 살아남게 했고 무엇이 나머지 둘을 죽게 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임신입니다. 여자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임신을 했는지 아닌지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 수 있죠. 9개월을 기다리면 되니까요.

메리 위트니는 그레이스에게 계급사회에 반기를 들라고 가르쳐주지만, 주인집 아들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주인집 아들에게 버림받은 메리는 불법 낙태를 받고 하혈끝에 죽습니다. 이 사건은 그레이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죠. 가정부 낸시는 주인인 키니어의 아내가 되고 싶어하지만, 키니어는 결코 그 자리를 낸시에게 주지 않습니다. 키니어는, 내 집에는 하인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있다면서 낸시의 위치를 분명히 하죠. 낸시는 그 집안의 마나님 (lady)가 아니라 첩(whore)이 됩니다. 그레이스를 고용한 이래로 낸시는 '난 너무 뚱뚱해'하고 초조해하다가 입덧으로 헛구역질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약해지면 죽는 거지요.

그에 비해 그레이스는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임신은 하지 않습니다. 영화 끝날 때 그레이스는 메리와 낸시가 원하던 것을 거머쥡니다. 태비라는 고양이, 소, 닭, 개, 말 두 마리. 자기 땅과 집을 가진 농부 남편. 그리고 자기가 손수 만든 퀼트 이불도 있죠. 하지만 살인녀 (murderess)라고 부르든, 창녀라고 부르든, 살아 있는 한 그녀가 승자입니다.

- 이 이야기는 또한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키니어씨, 의사 조단, 맥더못, 제레마이야, 혹은 그레이스의 아름다움을 넘보던 어떤 남자도 그레이스에게 아내로서의 지위를 주겠다고 하질 않습니다. (맥더못은 결혼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또한 창녀라면서 욕하고 같이 죽을 거라며 협박해요) 오로지 꼬마 제이미 만이 그레이스에게 그런 약속을 하죠. 그리고 그레이스는 결국 꼬마 제이미를 선택합니다.

- 의사 사이먼 조단은 그레이스의 이야기에 조금씩 끌려들어가면서 결국 그녀에게 욕망을 품습니다. 저는 그레이스가 최면술 (혹은 가짜 최면술)에 이끌려서 의사 조단의 숨겨진 갈망을 모욕하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봤어요. 나레이션에서 말하다시피 그레이스 역시 분명 젊고 잘생긴 조단에게 욕망을 갖고 있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비로소 자기의 고단한 노동,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해서 들어주는 사람. 조단이 펜을 놀려 그레이스의 말을 받아적을 때마다 천 개의 나비가 내 얼굴에 부드럽게 부딪는 것 같다고 그레이스는 토로합니다. 젊은 남녀 욕망은 그러나 한 걸음 남짓의 빈 공간으로 가로막혀 있죠. 하지만 그레이스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고, 의사는 좋은 가정, 좋은 교육, 높은 지위와 명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욕이라도 해야지 마음이 후련하겠지요. 

- Sarah Gadon이 10대부터 30대까지 연기하며 무시무시한 연기력을 보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6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1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31
124717 영화 '튤립 피버' [6] 2023.11.12 278
124716 [핵바낭] OTT와 옛날 영화 [4] 로이배티 2023.11.12 311
124715 29년 만에 우승 가즈아!”…‘신바람’ 난 LG, 파격할인 쏜다 [5] daviddain 2023.11.12 291
124714 오랫만에 크루즈 다녀온 짤막 잡담 [4] theforce 2023.11.12 232
124713 [왓챠바낭] 본 영화도 아닌데 추억 돋는 제목. '공포의 수학 열차'!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3.11.11 258
124712 프레임드#610 [6] Lunagazer 2023.11.11 84
124711 챗 gpt 쓰면서 [1] catgotmy 2023.11.11 208
124710 KS 3차전 시청률/2시 4차전 [24] daviddain 2023.11.11 230
124709 그레이트 마징가 주제가 [4] 돌도끼 2023.11.11 163
124708 마징가 제트 주제가 [4] 돌도끼 2023.11.11 184
124707 LG가 한국시리즈 우승에 좀 더 유리한 상황(현장발권없어서 못보시는 어르신들 외) 상수 2023.11.11 154
124706 어떤 해후(질풍가도, 출사표, 잘 있어요) 상수 2023.11.11 158
124705 넷플 계정 공유 잘 아시는 분 계세요?(기가 지니와 크롬캐스트) [4] 쏘맥 2023.11.11 430
124704 우승이 이렇게 힘든 건가요 [4] daviddain 2023.11.11 303
124703 일론 머스크 전기영화 제작소식 [5] LadyBird 2023.11.10 306
124702 드라마의 장점 [2] catgotmy 2023.11.10 179
124701 오겹살 첨 먹어본거 같은데 가끔영화 2023.11.10 133
124700 알고리즘의 폐해/KS 3차전 [37] daviddain 2023.11.10 205
124699 최근 읽은 책과 산 책.(무서운 눈이 나오니 주의하시길) [4] thoma 2023.11.10 308
124698 프레임드 #609 [2] Lunagazer 2023.11.10 7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