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요령 없음

2012.02.13 02:23

에아렌딜 조회 수:2848

어렸을 때 동네에는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 둘이 있었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어머니들이 자주 왕래했기 때문에 같이 노는 일이 잦았습니다.

둘은 사이가 좋았습니다. 늘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는 걸 좋아하던 저는 셋이서 놀고 있어도 그 둘만큼 사이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사이가 좋은 만큼 자주 싸우곤 했습니다. 싸운다기보단 가벼운 다툼이었지만, 둘이 잘 놀다가도 뭔가 틀어져서 한쪽이 나에게 와서 다른 한쪽의 악담을 늘어놓곤 했었습니다.

또 신기한 것은 다음날이 되면 둘은 멀쩡해져서 함께 놀곤 했던 것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맨날 싸우면서 또 시간이 지나면 잘 노는 걸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편이 훨씬 나았던 것이었구나, 그래서 인간관계가 잘 굴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는 뭔가 틀어지면 절대 없던 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말해야 직성이 풀리고, 틀어진 것이 있으면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돌리고 편해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마음에 안들면 얼굴에 다 드러나 버립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요령이 없습니다.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그냥 없었던 셈치고, 모르는 척하고 웃는 얼굴로 또 다시 만들어가야 하는 인간 관계라는 것.

지금에 와서는 조금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절대로 그렇게 재주좋게 세상살이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또 어머니와 마주 앉았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미친듯이 울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병원을 가겠다는 걸 견딜 수가 없다고요.

네가  우울하다, 병원을 가겠다는 소리를 할 때마다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요.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울고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보다 어머니에게 더 병원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립니다.

어차피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납득한 척 하기로 하고, 알았다고,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어머니 말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이나 온갖 말을 쏟아내고, 내가 굽힌 것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후로,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임시방편일 뿐이지요.

상처가 나은 것은 아닌데도,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의 상처를 봉합했을 뿐.... 상처는 안에서 서서히 곪아들어가고 있지요.

괴로운 일은 모르는 척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나에게는 용기가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재료가 아무것도 없지요.

 

모르는 척 하고 있으면 편했습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는 척을 하고.

 

이대로 좋은 걸까요.

아니, 좋을 리가 없는데.

당장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나도 어머니가 화내는 모습을 보기 싫으니까, 그냥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일들, 또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울고불고 미친 사람마냥 발광할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면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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