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1 22:44
- 1952년작이니 72년전 작품입니다. 런닝타임은 2시간 23분. 스포일러 신경 안 쓰고 막 적습니다.
(영화와 아무 관련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캐릭터... 특히 여자분 복장 때문에 무슨 하이스트물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ㅋㅋ)
- 한 무리의 가난한 동네 서민 아줌마들이 우루루 시청으로 몰려와서 민원을 넣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동네 물웅덩이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 못 살겠으니 어떻게 좀 해달라... 고 하는데. 시청 공무원들은 아 눼이눼이... 하면서 '우리 말고 저쪽 소관이니 그쪽 부서로 가 보세요'를 연속해서 날려대고, 아줌마들은 돌고 돌고 돌며 시청의 거의 모든 부서를 다 섭렵한 뒤 서러워하며 포기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 중 마지막 부서가 '시민과'라는 부서였고. 우리의 주인공은 이 시민과의 과장, 와타나베씨에요. 물론 이 분도 패스하고 끝냈죠.
근데 이 양반이 속이 너무 아파서 병원을 찾았는데. 대기실에서 마주친 수다쟁이 남자가 이상한 소리를 막 해요. 의사놈들, 환자가 암이라도 걸렸으면 솔직하게 말 안 해주고 이상한 소리만 한다.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문제는 주인공이 만난 의사가 조금 전 수다쟁이 남자가 했던 말과 정확하게 똑같은 대사를 줄줄 읊었다는 거죠. 아 나 암이구나. 곧 죽는구나. 라고 생각한 와타나베는 평소에 안 하던 일탈을 저지르며 어떻게든 이 충격을 잊어보려 하지만 뭘 해도 효과가 없구요. 그러다 퇴직할 테니 도장 찍어 달라고 찾아 온 젊은 부하 직원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삶의 활력 같은 걸 느껴버린 이 아조씨는 그만...
(올리는 김에 유명하고 익숙한 버전의 포스터도 올려 봅니다. 근데 사실 또 이 짤은 자세히 보면 배우님 표정이 살짝 에러에요.)
- 오래 묵은 영화답게 저도 오랜 세월에 걸쳐 봤습니다. 20세기에 동아리방에서 선배가 어디서 구해 온 비디오 본 게 첫 번째였고. 대략 2010년 즈음에 집에서 다시 본 게 아마도 두 번째였을 거고. 이번에 세 번째였는데요. 이렇게 매번 십여년을 텀을 두고 보다 보니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네요. 처음 볼 땐 솔직히 '재미는 있는데 이게 뭐 그렇게까지?' 였었구요. 두 번째 볼 때는 아주 감명 깊게 봐서 와 명작은 명작이구나... 했구요. 이번에 보면서 했던 생각은...
(깝깝 복지부동 공무원 인생 외길을 살아오신 우리의 주인공 와타나베상. 참 딱하지만, 정말로 깝깝합니다. ㅋㅋㅋ)
- 기억보다 사회 풍자, 블랙 코미디가 강한 이야기였네요. 두 번째 볼 땐 뭔가 주인공의 인간 드라마. 일생을 무의미하게 살다가 갑작스레 끝을 마주하게 된 아저씨가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아 보고 떠나는 이야기... 라고 생각하며 감명 깊게 봤는데요. 다시 보니 그런 인간 드라마보단 사회 풍자... 그러니까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 풍조에 대한 비판이 훨씬 쏙쏙 들어옵니다. 도입부의 민원인 토스토스 뺑뺑이 돌리기만 해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순 없는 풍경 아니겠습니까. ㅋㅋ 물론 근래 들어선 민원이 짱 먹는 분위기로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그동안 살면서 참 많이 들어왔던 류의 이야기죠.
(처음, 두 번째 볼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다시 보며 생각을 해보니 저 서류 더미도 웃기라고 쌓아 둔 거겠죠? 설마 이게 리얼리티였던 건 아니겠...)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그러니까 장례식장 장면부터는 아예 주인공을 뒤로 빼 놓고 이 공무원들 얘기만 하잖아요. 하기 싫다고 성질부리다 멱살 잡혀 억지로 일 해 놓고는 와타나베의 공을 다 꿀꺽하려는 부시장과 그에게 아양을 떠는 높은 공무원들의 모습. 이 분들 자리 뜬 후에 자기들끼리 브레인 스토밍(?) 하다가 와타나베의 진실을 깨닫고 "우리도 와타나베씨의 뒤를 따르자!!!"고 외치고는 다음 날 바로 복지부동 모드로 재부팅 되는 아랫 공무원들 모습. 이게 후반부 이야기에서 대략 8할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니 와타나베가 섭섭할 지경입니다. ㅋㅋㅋ
근데 이때 밸런스가 절묘해요. 그냥 이 인간들만 보여주면 보다가 엄청 속 터질 텐데, 적절한 타이밍에 동네 주민들의 조문 장면을 넣거나 와타나베 편을 드는 소수 사람들의 대사를 넣거나... 해서 나아쁜 놈들이 겸연쩍어하며 시선 돌리는 장면들을 한 번씩 보여주더라구요. 그래서 갑갑하기 그지 없는 상황임에도 짜증나지 않게, 적당히 웃어가며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윗분들, 부하들, 가족들이 자기 떠난 후에 모여서 추한 꼴 보이는 걸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구도가 재밌습니다.)
- 그리고 주인공 와타나베의 이야기는요...
솔직히 2024년에 보는 입장에선 뭔가 감성적으로 안 맞는 부분들이 좀 많았습니다. ㅋㅋ
영화의 전개가 대략 절반으로 나뉘는데요. 전반부는 그냥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여정을 따라가는 식으로 전개가 되고, 후반부는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씩 와타나베와 이 공원 프로젝트 추진에 대한 기억을 풀어내면서 그 기억 속 와타나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으로 흘러가거든요.
후반부는 괜찮아요. 장례식장에 참석한 공무원들의 수다를 통해 죽기 전에 일생 처음으로 '살기'를 결심한 와타나베의 죽기 전 마지막 모습들을 짧게 짧게 보여주는데 이게 그 자리에 모여 앉아 있는 다른 공무원들 행태와 대비가 되면서 참 멋져 보이거든요. 감동적이기도 하구요.
(서민들의 히어로! 와타나베!!!)
근데 전반부, 내내 그냥 와타나베가 대놓고 주인공인 이 쪽은... 그게 뭐랄까. 무식하게 말하자면 '좀 덜 재밌습니다'.
일단 초반에 술집에서 만난 소설가와 함께 심야의 환락을 즐기는 장면은 왜 때문에 이리도 길고 디테일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구요. 이후에 퇴직하려는 젊은 여직원에게 매달리는 와타나베의 모습은 솔직히 좀 무서워요(...) 상황이 상황이니 심정은 이해하지만 자꾸만 저 여직원은 무슨 죄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ㅋㅋ
시대와 문화의 차이도 있을 겁니다. 시무라 타카시,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개근맨이었던 (그리고 고지라 박사님!!!) 이 명배우님의 연기는 흠 잡을 데가 없이 강렬하지만 그 캐릭터가 말이죠. 요즘 사람 관점에서 보자면 많이 답답하면서 좀 과하게 외곬수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있어요. 위에서 말했듯이 여직원은 저 상황에서 얼마나 곤란하고 무서웠을까...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게 만드는 거죠. ㅋㅋㅋ 술집에서 와타나베가 노래를 부를 때 다른 손님들이 보이는 반응도 좀 어색하구요. 뭐야 이 분위기 깨는 할배는... 이런 표정으로들 자리를 피하는데 아니 그럴 정도야? 라는 생각이. ㅋㅋ
70년 묵은 고전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잘못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좀 그랬어요.
(할배 사정은 사정이고 저 젊은이 입장에선 그저 음침하고 기분 나쁜 아저씨가 집요하게 달라 붙는 상황일 뿐... ㅋㅋ)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영화는 좋았습니다.
영화 전반에서 느껴지는 삐딱한 유머 감각도 좋았구요. 후반부의 파격적인 (결국 내내 장례식장에 모인 공무원들의 수다로 전개되는) 구성도 재밌게 잘 만들었구요. 공적을 빼앗으려는 윗분들이든 함께 일하던 아랫 사람들이든 다들 와타나베 불행을 믿어 의심치 않던 와중에 등장한 경찰관이 "너무 행복해보이셨습니다." 라는 반전(?)을 전하면서 보게 되는 그 전설의 놀이터 그네 장면은 다시 봐도 찡했구요.
제 취향 기준으로는 전반부를 조금만 덜어내서 두 시간 정도로 맞췄음 더 좋았겠지만 뭐 그냥 제 생각입니다. ㅋㅋㅋ 혹시 아직도 안 본 분이 계시다면 한 번 보세요. 70년 묵은 고전이라지만 어려운 것도 없고 그냥 재밌게, 감동적으로 잘 만든 드라마이자 사회 풍자 코미디였습니다. 끄읕.
(마지막 공무원들 모습 때문에 살짝 배드 엔딩 분위기도 풍기지만, 그네 장면과 마지막 이 장면을 생각하면 그래도 역시 희망 엔딩이었던 거겠죠.)
+ 왓챠 vod 목록을 뒤지다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이 올라와 있는 걸 알고 그걸 한 번 보려다가 '오리지널도 많이 까먹었으니 예습이나 해볼까' 하고 다시 봤어요. 리메이크작의 주인공은 빌 나이가 맡았는데, 너무 위풍당당 비주얼 아니신가 싶지만 연기력이 있으니 잘 하셨겠죠.
++ 그러니까 이 영화가 52년작인데 말입니다. 지금 확인해보니 배우님이 1905년생. 그러니까 고작 48세였던 걸 분장과 연기로 커버 겁니다. 아니 이 양반이... ㅋㅋㅋㅋㅋㅋ
+++ 전설의 그 장면, 그 노래 영상입니다.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 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머릿결이 아직 눈부시게 빛날 때
사랑의 불꽃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2024.05.31 23:53
2024.06.01 00:00
구로사와의 안 액션 영화(?)들 중에선 '라쇼몽'과 함께 가장 고평가에 인기도 많은 작품이죠. 왓챠에서 리메이크작 제목을 보고 설마? 해서 확인해보니 맞더라구요. ㅋㅋ 그것도 이미 봤는데 원작 대비 나이브한 톤의 감동 휴먼 드라마로 만들었더군요. 덕택에 원작의 시니컬, 까칠한 톤이 사라져서 무난한 대중 영화가 되어 버리긴 했는데... 대신 또 원작에서 이야기상 좀 덜컹거리는 부분을 다듬어서 매끈하게 만들어 놓은 부분도 있고 해서 그건 그것대로 재밌게 봤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고 보면 급전개는 원작이 더 심해요. ㅋㅋ 중반까진 진득, 느릿, 디테일하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장례식으로 점프하고 나면 장르가 바뀌는 기분이거든요. 보다 보면 잘 수습되긴 합니다만... 하하.
2024.05.31 23:56
듀나님도 예전에 별점을 매기셨죠. (별 넷) 개인적으로는 시민케인에 대한 카운터 펀치같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켄지가 우울모드로 우울한 노래도 부르다가(...) 혼자 나와서는 여직원을 꼬드겨서 맛있는 것도 먹으려다가, 공장에서 인형만드는 일이 전국 아이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말이...약간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역발상 느낌도 나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해피버스데이 노래(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올라오는 한 여학생을 위한 노래지만) 정말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도 좋았습니다.
2024.06.01 00:05
시민 케인이랑 비슷한 점이 보이긴 하더라구요. 막판에 모자 등장할 땐 로즈버드 생각도 잠깐 났고... ㅋㅋ 뭐 구로사와 아키라도 워낙 그 시절 헐리웃 영화들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니 (그러고서 역수출하긴 했지만요 ㅋㅋ) 정말로 영향 받았을 가능성도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생일 축하 노래 장면은 저도 좋긴 했는데, 그 시절 이야기답게 좀 비약이라는 생각도 좀 들었어요. 리메이크는 그걸 어떻게 고쳤을까 했는데 그것도 그냥 훅. 하고 깨달음 얻는 식으로 나가더군요. ㅋㅋ
2024.06.01 12:39
이번에 보신 감상과 제가 본 감상이 비슷해요. 그리고 저도 후반은 아주 흥미롭게 보았으나 전체적으로는 기대보다 재미있게 본 건 아니었어요. 고전 영화를 많이 본 게 아니라 내공 부족도 있고 이 영화의 명성 때문에 과하게 기대해서 그렇기도 한 거 같아요. 그래도 보고나니 세월 지나도 인정받는 품위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영화가 좋았다고 느낀 건 확실했습니다.
2024.06.01 15:20
2024.06.01 17:19
아 이게 리메이크가 있었네요. 덕분에 알았습니다......하고 검색을 해보니 존재 자체는 알고 있던 영화네요. 리메이크인걸 몰랐어요 ㅎㅎ
왓챠에 있군요. 주말에 봐야겠어요. +이키루송 아주 좋군요. 전설의 그네를 제대로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2024.06.02 00:33
리메이크작이 나름 여기저기서 상도 많이 받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도 되고 그랬더라구요. 평가도 되게 높고... 어제 봤는데 재미도 있습니다. 굳이 원작 안 보고 봐도 충분히 재밌게 잘 만든 영화였어요. 즐겁게 보시길!
2024.06.01 19:50
글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이른바 '무한도전' 시절의 이야기인데요>_<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감독전으로 열편을 하면 영화당 세번씩 해주거든요.
그 서른번을 다 보러다니던 시절이어요. 십년전 쯤 되요. 써주셔서 기억은 부분부분 나는데 와타나베의 불쌍한 표정은 생생하네요. 위 사진에 있어요!
저는 구로자와 영화 중에는 [천국과 지옥]이 좋은데 많은 씨네필들이 꼽더라고요. 미후네 도시로가 구두 만드는 '장인'으로 나와요. 요즘은 쉬엄쉬엄 봐요 :)
2024.06.02 00:35
'천국과 지옥'은 꽤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만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이게 말씀대로 무슨 상영회 같은 걸 찾아가야 볼 수 있는데 제가 그리 성실하지 못해서요. ㅠㅜ 이야기가 딱 제 취향인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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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빌 나이 나오는 리메이크를 리메이크인지도 모르고 봤어요. 구로사와 감독님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 거미성, 악인의 요새 뭐 이런 것만 알고 있었고 앞의 두 작품만 봤는데 이건 몰랐죠.
내용이 감동적이긴 한데 뭔가 중간에 과정을 휙휙 건너뛰고 급전개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원작의 러닝타임이 약 40분이 더 기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