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8 21:36
이 집은 주유소 집이라고 불렸습니다.
동네에 있는 작은 주유소였는데 그때는 차에 넣는 용도 못잖게 집집마다 많이 썼던 석유 곤로 용도로 소매로 기름을 판매했던 것 같아요. 제가 기름을 사러 간 기억은 없지만 우리도 곤로를 썼습니다. 이 집은 대문 없이 주유소 옆으로 트인 공간이 넓은 마당으로 이어져 있고 집과 주유소를 마당에 있는 나무들이 가려 주었습니다. 문이 아예 없진 않았고 담장 끄트머리에 작은 외짝 문이 하나 있어서 그리로 출입을 많이 했네요.
이 집과 주유소의 소유자는 할머니라고 하기엔 여러 가지가 어울리지 않는 중늙은이였습니다. 그때의 제가 보기에 차를 운전하는 할머니는 이상했거든요. 마당 한 편에 세워 뒀던 작은 차를 몰고 다니셨습니다. 가족 없이 혼자 지냈는데 아들이 멀리 산다는 얘긴 들은 거 같아요.
이 집은 꽤 컸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본식과 서양식이 섞인 일본식 집이었어요. 방들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복도 끝에 화장실이 있고 완충 지역(?) 방을 사이에 두고 건너건너 방부터 주인의 거주 구역이었어요. 실내가 복도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보호자들은 왜 그런 이상한 구조의 집에 세를 든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정상이 아니네요.
이 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제목에서 짐작하시겠지만 집 주인입니다. 장차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까지는 아니지만 은연 중에 이분의 모델이 제 마음에 스며들게 됩니다. 길쭉한 몸매와 예사롭지 않은 차림새.(그렇습니다, 그때는 선글라스를 일상으로 착용하는 사람은 드물었거든요.) 필요한 얘기 외엔 이웃과의 수다 같은 건 없었습니다. 명절에는 생과자를 상자에 담아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집에선 송편이나 강정을 담아 돌려드렸고요. 제가 그걸 들고가면 차분한 미소와 다정함으로 받았지만 쓸데없는 질문(공부 잘 하냐, 커서 뭐 되고 싶냐, 뭐 먹고 이래 예쁘냐 등) 같은 건 한 번도 건네지 않았어요. 저는 이 중늙은이에게 호감을 가졌고 궁금했지만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현실은 그런 궁금함 때문에 제가 무슨 사고를 치는 일도 없었고 우연의 손이 도와서 이분의 사연을 알게 되는 계기 같은 건 전혀 생기지 않았어요.
그냥 가족들이 하는 얘기를 조금 얻어들었을 뿐입니다. 일본에서 오래 생활했다던가 부모 중 누가 일본인이라던가... 기억도 희미한 이런 얘깁니다.
그 집 마당에 밤이 되면 나무들이 무서웠다, 창에 불이 켜져 있는데 커튼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음악 소리가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걸 들은 것 같다, 이제는 이게 전부 진짜 기억인지 영화나 책에서 본 장면이 덮어 쓴 것인지 혼동이 됩니다.
하지만 그 집은 진짜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그 동네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 주인인 멋쟁이 여성도 진짜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겠지요.
2023.04.18 23:28
2023.04.19 12:44
이 집에 얽힌 더 이상한 사람들 이야기도 있지만 차마 그까지는...
2023.04.19 09:07
집을 눈에 보는 것 같아요. 저도 어릴 적에 친척 어른이 관사에 사셔서 그런 집이 꽤 익숙합니다. 그 집은 적산가옥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동네에도 규모는 작지만 그런 느낌 집이 있어서 출근 길에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곤 합니다. 남이 보면 땅값을 재고 있는 업자로 보일 것 같지만요.;; 아마 진짜 업자에 의해 조만간 밀리겠지요.
그런 집에 딱 어울리는 분과 인연이 있으셨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2023.04.19 12:43
지금은 적산가옥을 보기 어려워졌어요. 어릴 때 봐서 그런지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윗글의 집은 다른 적산가옥보다 크고 나무가 몇 그루 있는 마당까지 끼고 있어서 지금도 한번씩 생각이 납니다.
2023.04.19 19:28
그러게요. 일반적인 삶의 양식을 벗어나는 존재는 늘 있어왔던 건데, 소수는 그만큼 접하기 어렵고 알려지기 어려워서 쉽게 잊혀지죠. 공유해주신 추억이 흥미롭습니다.
서울 도심에는 그래도 적산가옥의 형태가 남아 있는 동네가 몇 군데 있어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 시내 여러지역을 현장 조사 했던 자료집 중에 후암동에 대한 것도 있는데 그 책에서 아직 남아 있는 적산가옥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나서 찾아보니 이북을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네요.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2&seq=20160616164459919&sso=ok
2023.04.19 20:22
공유해 주셔서 후암동 자료집 이북을 봤습니다. 주택 사진 위주로, 글은 띄엄띄엄 넘겨 봤지만요. 윗 글의 집과 닮은 집은 못 찾았네요.
동네 역사와 동네 주택의 변천사를 저렇게 만들어 놓기도 하는군요. 필요한 일인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잘 봤어요.
2023.04.19 20:30
뭔가 훌륭한 단편의 도입부 읽는 기분인데요. 사실 이와 비슷한 경험도 해 본 적 없지만 되게 생생한 느낌으로 잘 읽었어요. ㅋㅋ
2023.04.19 20:41
밤에 화장실 가다가 복도 저쪽으로 옷자락 끄트머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살금살금 뒤따라 갔는데 하얀 가부키 가면이 똭!
로이배티 님의 취향에 맞는 집이었을까요. ㅎㅎ
그때 조금 사고를 쳐서 사건을 만들었으면 이야기거리로 그럴 듯했을 텐데 말씀 들으니 아쉽.
2023.04.20 11:03
일본의 료칸을 다녀온 후에 이 글을 보니 이상한 소회에 젖는군요. thoma님의 실제 과거일텐데 미디어에서 보는 것처럼 집주인의 모습과 일본식 집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하게 그려집니다. 아마 그 긴 복도를 일일이 걸레질하느라 집주인은 애를 먹었을까요. 다른 디테일들이 더 궁금해지는군요
2023.04.20 13:24
덕분에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앞치마와 머리수건을 하고 밀대를 밀던 집 주인의 모습요. 복도가 길어서 자주 청소하진 않았고 실내화를 신고 다녔는데 그 슬리퍼 소리도 기억나네요. 우리가 사는 복도까지 오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청소 안 하는 경계 부분에 먼지가 앉아 있던 것도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