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바낭

2013.06.14 00:01

언젠가 조회 수:1954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과 잡상에 의해 쓰여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1.

이틀 전에 직장을 떠나왔습니다.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1년이었습니다.

제가 거의 유일하게 좋은 얼굴로 떠나온 직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 유일하게 누군가 눈물을 보여준 직장이었습니다.

그 눈물이 꼭 서운함 때문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슬프게 여겨준다고는 생각해도 되겠지요?

정말이지 사장만 아니었다면 천년만년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곳이었기에 아쉬웠지만...

지나치게 지쳐 있었기에 떠나올 때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고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습니다.

참 묘하지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마음과, 그 이상 없을 만큼 홀가분한 흥분이 공존하다니.

사실 울적해지려면 금방 밑도끝도 없을 것이기에, 애써 슬프다는 생각을 피하려고 하기도 한 탓도 있습니다...


슬픈 마음이나 이야기야, 털어놓자면 한도끝도 없이 있겠지만... 생략합니다.



2.

지금은 후쿠오카의 호텔에서 쓰고 있습니다.

일을 그만두자마자 온 몸이 아파오고 머리가 시종 어지럽습니다만..

그래도 후쿠오카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다녀오자고, 텐진의 루피시아에 다녀왔습니다.


루피시아에 들른 것은 2년 전에도 한 번 있습니다만... 

사실 그때도 어떻게 찾았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용감하게도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한 시간 반을 헤멨습니다.

결국 스마트폰의 지도를 보면서 사람에게 물어물어 도착하니 참 낯익은 곳이었습니다...

길치에 방향치인 자기 자신을 늘 과신하고 또 후회하는 게 일과입니다.


사실 반나절을 호텔에서 빈둥거리며, 나갈까 말까 고민했다는 건 비밀입니다.

저는 모르는 어딘가를 나간다는 게 너무나 고역입니다.

길을 못 찾겠거든요.

여기가 어딘가 난 누군가를 끝없이 반복하는 과정, 사람에게 물어물어 지도를 찾고 또 봐도 대체 길이란 것은 왜 이리도 복잡하고 심오한 것인지.

워낙 촌동네에 살다보니(한 시간이면 대략 시내를 돌아볼 수 있지만 그나마도 길을 잃는 저란 방향치는...) 대도시에 오면 참 머리가 아픕니다.

길 찾다 하루가 다 가니 남들이 한 다섯 군데쯤 구경할 시간에 한 군데를 찾고 또 찾습니다.

후우.

어쨌든 루피시아에 들러 아이스티도 한 잔 하고, 직장 여러분에게 보낼 선물로 차를 잔뜩 샀습니다.

2년 전에 들렀을 때는 가진 여비에서 얼마쯤 쓰면 괜찮을까, 하면서 궁핍한 학생이란 처지에 서글펐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산 것은 세 개였는데 그 중 두개는 꽝이었습니다. OTL


지금은 그나마 그동안 번 돈이 있으니, 내가 번 돈 내가 쓰는데 누가 뭐랴 하면서 마구마구 샀습니다.

신나게 선물을 사고 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저 때문에 늦게 퇴근하게 된 직원 언니들 미안해요...

받은 고마움만큼, 보내고 싶은 보답만큼 사지는 못했습니다(아마 그러려면 제가 번 돈의 절반은 써야 했을 거에요). 그래도 꽤 많이 샀습니다.

택배까지 부탁하고 나오니 그냥 마음이 조금은 기뻤습니다.

선물을 받으시고 기뻐해주셨으면 좋겠네, 좋겠네.



3.

생각해보면,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습니다.

바다 건너 땅에서, 설령 다시 일본에서 일하게 된다 해도 벌어먹고 살 일이 있으니 언제 오가게 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한 번 헤어지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인연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잘해주셨는데.

정말 고마웠는데.

다시 만날 기약이 없습니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부족한 것 뿐 아니냐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시 또 그 땅에 올 일이 있을까요.

생각하면 또 눈물이 날 것 같기에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방 한 구석엔 주소와, 편지가 들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힘내, 가끔 날 떠올려주렴.. 이라고 적힌 편지가.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만큼 슬픈 것도 없는데.

저는 보답을 하고 싶은데...

그것도 그냥 욕심에 그치겠지요.




4.

떠나오기 전까지도 방 청소를 했지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청소를 못 합니다... -_-;

제가 쓴 방은 어머니 가라사대 돼지우리, 미친x 궁둥이같은 곳이 됩니다. -_-;;

정말 청소해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쓰레기가 사업장용 봉투로 열 봉투 정도 나왔습니다. -_-;;;

짐은 또 뭐가 그리 많은지, 택배로 한 상자 부치고 안심했더니 또 한 상자 나왔습니다.

결국 잊어버리고 차에 올랐다가 아차 한 것은 안 자랑...


-_-;;;;

돈 많이 벌면 꼭 집 청소해 줄 사람을 고용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결국 자기가 하겠다는 생각은 죽어도 안 하는 게으름뱅이)




5.

사실 돌아가도 뭔가 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취직처는 정해지지도 않았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보나마나 어머니와는 또 싸우게 될 겝니다.

그 모든 게 눈에 뻔히 보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냥 안도하고 싶습니다.

병원에도 가야겠지요.

허무가 절 집어삼키기 전에, 지금은 그냥 쉬고 싶네요.


아무 생각이 안 난다, 고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며...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이만 자야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22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28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613
198 [듀9]트위터 답글에 대해: 해결되었습니다ㅜㅜ [15] 낭랑 2013.07.01 1784
197 [듀나 생활지식인]휴학생이 프로페셔널 데이에 방문하면 안될까요. [2] TESCO 2012.10.15 1802
196 스가 시카오 '황금달' [2] calmaria 2011.03.01 1804
195 카다피가 이미 죽었을지도(추측 입니다) 내용없음 [5] 가끔영화 2011.02.25 1812
194 (디아블로3) 지금 정신붕괴 중. [12] chobo 2012.06.27 1821
193 [듀나인] 스마트폰에서 판도라 팬캐스트로 야구 보는법 [2] jay 2011.05.25 1835
192 동요와 힘든 퀴즈 [1] 가끔영화 2010.09.22 1849
191 (디아블로3) 속뒤집는 소리 하는 기사단원, 정신차려라! 그러니 악마사냥꾼 언니가 한마디 하지. [7] chobo 2012.06.15 1852
190 당신이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 [4] lonegunman 2014.02.13 1894
189 [전자제품 듀나인] 티비모니터 써보신 분 어떤가요? [12] moonfish 2012.01.24 1900
188 수혈과 교리 [19] 와구미 2010.12.13 1922
187 [강아지] 나왔어요. [6] 닥호 2012.10.08 1923
186 아더왕의 누이가 나오는 소설 제목 아시는분.... [4] 바다참치 2010.11.14 1931
185 케이윌&효린(시스타) 듀엣 - Whenever You Call (머라이어 캐리) [2] 둘세데레체 2010.12.14 1940
» 근황바낭 [8] 언젠가 2013.06.14 1954
183 아버지는 군대 얘기를 절대 안하신다. [2] 닥호 2012.09.14 1955
182 정리하는 일. [3] paranoid android 2011.02.19 1967
181 드디어 내한 하는 군요. [5] fuss 2011.01.27 1987
180 날아가는 사람 누구일까요 [2] 가끔영화 2010.12.02 1990
179 칼, 곰발, 능이버섯 백숙 [16] 칼리토 2014.06.30 204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