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0 07:19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제가 본 영화들 중 여자중학생이 주인공인 영화가 세 편이나 되었습니다.
[시체들의 아침], [보희와 녹양], [벌새]. 중학생 나이의 캐릭터는 영화에서 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좀 신기했어요.
이승주의 [시체들의 아침]은 올해 가장 인기있었고 입소문도 만만치 않았던 단편영화 중 하나입니다.
감독의 전작 [죽부인의 뜨거운 밤]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지요.
영화의 주인공은 실패한 호러영화감독 성재입니다. 성재는 이사 가기 전에 집에 갖고 있던 DVD 콜렉션을
모두 처분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민지라는 여자아이가 성재의 콜렉션 중 조지 A.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의
특별판 DVD 세트만 사겠다면서 찾아옵니다. 성재는 낱개 판매는 거절하지만 이미 로메로 좀비 영화 전작을
마스터했고 아르젠토가 편집한 유럽 개봉판만 보겠다는 민지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잠시 방과
텔레비전을 빌려주지요.
민지의 캐릭터에겐 좀 믿음이 가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조지 A. 로메로의 팬인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는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며, 그 아이와 톰 새비니의 특수 분장과 카메오 출연에 대해 수다를 떨면
한없이 즐겁겠지요. 하지만 지금 막 중학생 나이에 접어든 아이의 취향이 향수 젖은 DVD 세대 호러 영화팬과
같을 것이라고, 그 아이가 [시체들의 새벽]을 그 호러팬들과 같은 눈으로 볼 거라고는 믿지 못하겠어요. 한동안
잔혹 묘사의 극단을 달렸다는 평을 들었던 로메로의 좀비 영화는 더 이상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아요.
고백하지만 DVD 세대들에게도 그렇게까지 무서운 영화는 아니었지요. 성재는 [부산행]의 좀비 묘사를
비웃었지만 [부산행]을 본 관객이라면 로메로의 삼부작은 그냥 쉽게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아이는
좀비 영화와 물리 매체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그 취향의 충돌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박서윤 배우의 생기발랄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민지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오로지 중년에 접어드는 특정 취향을 가진 남자 영화광의 백일몽 속에서만 안전하고 해없게 존재해요.
그러고보니 역시 남자 영화광과 그 남자의 희망을 물려받는 여자아이의 관계를 다룬 재미있는 단편영화가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 한 편 더 있습니다. 조현민의 [종말의 주행자]라는 작품인데, 주변의 모든 것을 영화처럼
해석하는 주인공 영화평론가는 여자아이가 등장하자마자 “클리셰!”라고 외치죠. 물론 그가 그걸 인식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스테레오타이프에 빠지는 걸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의 아침]은 세 편의 영화 중 지금의 저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공감되었던
영화입니다. 이전까지 제목과 입소문만 들었던 호러 고전을 DVD를 통해 접했던 호러 장르 팬의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물리 매체와 장르에 대한 사랑이 영화 속에서나마 다음 세대의 영화광에게
전달된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 수가 없지요.
(18/12/10)
★★★
기타등등
민지로 나오는 박서윤 배우는 [벌새]에도 나와요.
감독: 이승주,
배우: 강길우, 박서윤,
다른 제목: Morning of the Dead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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