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22 21:53
[간첩]의 주인공은 당연히 북에서 내려온 간첩들. 하지만 이들을 일반적인 반공영화의
틀 안에서 다룰 수는 없습니다. 진지함과 무게를 유지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었으니까요.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간첩들 중 반공영화의 틀 안에 있는 인물들은
그냥 없습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재미가 없고 관객들이 설득되지 않기
때문이죠.
[간첩]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생활형 간첩들입니다. 북에서 내려오긴 했는데,
위에서 지원이 끊긴 지 오래라서 스스로 알아서 자기 생계를 챙겨야 하지요. 누구는
중국을 오가는 오파상이고, 누구는 은퇴한 동사무소 소장이고, 누구는 부동산 사무소
주인이고, 누구는 시골에서 소를 키웁니다. 그들 중 몇 명은 결혼해서 애도 있고,
한 명은 북쪽 가족과 남쪽 가족 모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영화는 이를 전반부의 코미디 소재로 삼습니다. 먹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날이 선 코미디는 못 됩니다. 생활형 간첩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장르의 소재였으니까요.
[간첩 리철진]만해도 1999년 영화입니다. 이미 여러 번 사용된 낡은 소재인 거죠.
그러니 당연히 아이디어의 신선함을 믿는 대신 오래된 아이디어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새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는데, 영화는 그걸 안 합니다. 그냥 '생활형
간첩이다!'를 외치는 것으로 만족해요.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중간 정도는 갈 것 같았던 코미디는 중간에 주저앉습니다.
그건 1시간 정도의 인물 소개가 끝나면 갑자기 장르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북에서
망명한 거물을 암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암살자들이 내려오거든요. 주인공들은
이 안에서도 여전히 생활형 간첩 역할을 고수하며 코미디 안에 남으려 하지만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러기엔 이야기가 지나치게 심각해져버려요. 다시 코미디로 돌아가기엔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첩보 액션으로 정착해야 할 텐데, 영화는 여기에서도 실패합니다. 액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숨이
짧아요. 기껏해야 임기응변으로 눈 앞의 사고를 막는 것이 전부인데, 그것도 잘
못합니다. 북에서 온 암살자들이 설치는 동안,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초반에는 그럴 수 있죠. 아니, 중반까지도 그럴 수
있습니다. 첩보물이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럴 거라면 곤란하지요.
이러니 영화는 순전히 배우들의 실력과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앙상블은 좋은 편입니다. 대본이 준 평면적인 캐릭터 묘사만으로 썩 그럴싸한 인물들을
만들어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특히 김명민은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가족들을 구하려
뛰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남자를 연기하고 있는데, 이 끈질긴 일관성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간첩]은 이 소재와 이 아이디어로도 여전히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굳이 [간첩 리철진]과 비교하며 발전이 없네, 라고 트집잡을 필요는 없어요. 간첩 소재로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주제가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이용될 수도
있고 저렇게 이용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이런 소재들을 제대로 묶고 통제하지 못해
영화를 산산조각을 낸 것까지 변명을 해줄 수는 없군요.
(12/09/22)
★★
기타등등
[간첩]은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엔 나쁜 제목입니다. 검색이 정말로 힘들어요.
감독: 우민호, 출연: 김명민, 염정아, 유해진, 변희봉, 정겨운, 다른 제목: Spy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Spy.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2471
2012.09.24 07:45
2012.09.24 08:28
2012.09.24 14:27
2012.09.27 00:23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52 | 더 콘서트 Le concert (2009) [1] [3] | DJUNA | 2010.11.13 | 12021 |
351 | 친구와 연인사이 No Strings Attached (2011) [5] [36] | DJUNA | 2011.01.31 | 12019 |
350 | 밤의 여왕 (2013) [3] [7] | DJUNA | 2013.10.13 | 11965 |
349 | 대학살의 신 Carnage (2011) [5] [1] | DJUNA | 2012.08.04 | 11917 |
348 | 인 디 에어 Up in the Air (2009) [1] [1] | DJUNA | 2010.02.25 | 11878 |
347 | 로고라마 Logorama (2009) [2] | DJUNA | 2010.03.08 | 11870 |
346 | 프랑켄슈타인의 군대 Frankenstein's Army (2013) [3] | DJUNA | 2013.07.21 | 11868 |
345 | 미나 문방구 (2013) [1] | DJUNA | 2013.05.10 | 11834 |
344 | 원더풀 라디오 (2011) [10] [3] | DJUNA | 2011.12.21 | 11779 |
343 | 컴퓨터 체스 Computer Chess (2013) [3] [34] | DJUNA | 2013.07.26 | 11755 |
342 | 시체가 돌아왔다 (2012) [3] [1] | DJUNA | 2012.03.20 | 11752 |
341 | 헤드 (2011) [5] [1] | DJUNA | 2011.05.19 | 11693 |
» | 간첩 (2012) [4] [1] | DJUNA | 2012.09.22 | 11451 |
339 | 특종: 량첸살인기 (2015) | DJUNA | 2015.10.23 | 11387 |
338 |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 (2010) [5] [2] | DJUNA | 2011.03.17 | 11349 |
337 | 럭키 (2016) [1] | DJUNA | 2016.10.10 | 11277 |
336 |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2018) | DJUNA | 2018.08.18 | 112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