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리뷰랄라랄라] 파괴된 사나이

2010.06.16 10:34

DJUNA 조회 수:5128

사이코패스 유괴범이 어린 소녀를 납치해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체포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유괴범은 아이와 함께 사라집니다. 8년 뒤, 유괴범은 아버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군요. 아이를 잃은 뒤 속이 타들어갔을 부모 입장도 끔찍하고 8년 동안 유괴범에게 감금되어 살아야 했던 소녀의 입장도 끔찍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녀와 가족의 이야기를 관객들의 일반적인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치밀한 묘사로 그려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복수와 구출 과정을 통해 이 끔찍한 상황을 날려버릴만큼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관객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이죠. 물론 다른 길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유괴범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방법이 있는데, 이건 연쇄살인범을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파괴된 사나이]에서는 어떤 길을 택하고 있을까요? 그걸 모르겠단 말입니다. 영화는 유괴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도 신경을 쓰고 싶어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도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길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파괴된 사나이]에는 위에 제가 언급한 재료들이 조금씩 있는데, 이들 중 어느 것도 의미있는 구조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제목의 '파괴된 사나이(어쩌자고 알프레드 베스터 소설에서 제목을 훔쳐올 생각을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인 소녀의 아버지 주영수의 캐릭터 묘사입니다. 그는 잘나가는 목사였다가 딸이 유괴된 뒤 신앙을 잃고 의료품 수입업자로 살아가고 있지요. 들어보니 신학대학 가기 전에는 의대생이었다고 하고요. 하긴 8년 동안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었다면 뭔가 거창한 캐릭터 드라마가 나올 법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주영수는 그냥 재미없는 인간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얄팍하고 불쾌한 사람이지요. 그 동안 그와 가족들이 겪었던 고생이 심각했다는 걸 고려해도 도저히 정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영화 초반에 전 이 영화가 혹시 스릴러를 가장한 기독교물로 가는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중반을 넘기자 차라리 이 인간이 종교적 갈등이라도 겪기를 바랐어요. 그래야 캐릭터의 내면이 조금이라도 구경할만 할 테니까요.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으니, 주영수의 머리가 굉장히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건 뉴스도 아니죠. 김명민이 지금까지 연기한 스릴러 주인공들은 모두 아이큐가 참담하게 낮았으니까요. 유괴범의 머리 역시 그렇게 좋은 게 아닌데, 주영수는 그를 한 방에 보낼 단서들을 한웅큼 쥐고 있으면서도 그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활용 안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중반 이후 그는 유괴범의 차번호를 알아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번호도 엄청나게 쉬워요. 그런데 그는 이런 상황에서 차번호를 확인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단 말입니다. 뒤에 딸을 구하기 위해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기가 막혀요. 관객들을 앞질러도 모자랄 판에 한참 뒤에 뒤쳐진 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으니까요. 서스펜스고 두뇌싸움이고 없습니다. 앞에서 기어가는 똥차를 보는 기분이에요. 


딸의 목숨이 달린 위기 상황 역시 서스펜스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관객들은 "아, 빨리 아빠가 저 불쌍한 애를 구출하고 나쁜 놈을 때려 잡아야 할 텐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빨리 영화를 끝내고 얘 좀 그만 괴롭혀!"라는 생각만 들어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8년 고통을 보상할만한 강도의 카타르시스가 제공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느낌이 들고 그건 결국 사실로 밝혀집니다. 이 물에 물 탄 것 같은 싱거운 결말을 보고 관객들이 무언가를 느끼기를 기대한다면 다들 엄청 낙천적인 거죠.


남은 것은 김명민의 캐스팅과 연기입니다. 김명민은 좋은 평가를 받는 배우지만, 전 그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평가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장르물 연기가 그리 볼만하지 않다는 겁니다. 캐릭터들이 모두 나빠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그의 장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는 대부분 평면적이고 지루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발성만 좋아서 그 지루함이 더 튀었지요. 이 영화에서는 조금 더 나빠졌습니다. 그가 위악적인 연기를 하면서 대사를 읊을 때는 종종 움찔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최민수 성대모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유괴범으로 나오는 엄기준은 어떠냐고요. 아, 그도 김명민만큼 목소리가 좋습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기타등등

감독 우민호는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라는 영화로 기독교 영화제 수상경력이 있는데,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신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파괴된 사나이]도 기독교 영화는 아닙니다. 그냥 기독교인들이 주인공인 영화로 보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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