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망했어요.

2011.09.13 23:42

hj 조회 수:5899

네네. 요즘 fermata 님의 글을 재미나게 읽고 있노라면, 아아 박근혜 망했어요. 라는 말만 떠오릅니다. 대세라는 믿음은 참 거품같은것이로군요. 물론, 이렇게도 다이나믹한 코리아니까, 남은 일년여동안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박근혜는 '수비형 정치인' 입니다. 형세를 읽고 날카롭게 치고나간다거나, 이슈를 선점하여 공세적 위치를 취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마지막순간까지 의중을 감추고 뜸을 들이다가, 대세가 결정날 무렵쯤에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살짝 발을 들이미는 것으로 지난 몇년간 꽤나 재미를 보아왔지요. 그런데, 의중을 감추다니, 과연 감출 의중이 있긴 했던걸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수첩공주' 라는 귀여운 별명이 왜 생겨난 것이겠어요. 수첩 없이는 한마디도 못하는, 컨텐츠가 없는 정치인이라는 세간의 평가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보여준 바로는 박근혜는 말을 그다지 잘 못해요. 한나라당 경선 때는 우리 가카에게도 발렸습니다. 가카는 뭔가 내용은 없는 얘기를 줄줄줄줄 해대는 데 반해서, 공주님은 그냥 버벅버벅. 이산화가스니, 산소가스니 했던 것도 그때고요.



그러니, 박근혜로서는 말을 극도로 아끼는 것은 나름 훌륭한 전략이었습니다. 괜히 말많이 하다가 실수해서 밑천 드러낼 필요는 없는거죠. 이정도 무게를 지닌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입장을 밝혔어야 할 타이밍에, 박근혜는 말을 아끼고 한발 물러서있는 포지션을 고수하면서 '신중하고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 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왔습니다. 그 사이에 박근혜의 대항마들은, 여기자 뺨을 만지고,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는 얘기" 나 하고, 여기자에게 "맞을래요" (정확한 워딩은 아닙니다만) 라고 하고, 주민투표쇼를 벌이면서, 줄줄이 자살골 행진을 벌였습니다. 야권엔 아예 인물이 보이질 않았고요. 이미 벌어놓은 점수는 많고, 남은 일년동안 조심조심 수비만 하면 대권은 따놓은 당상이었죠. 지금까지는.



올초까지만 해도 문재인, 안철수는 둘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요. 여러 재야의 인재 중에서도 안철수는 가장 마지막까지도 움직이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이 슬금슬금 자기가 할 일을 고민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안철수가 움직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철수 마저도' 움직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문재인 하나만 해도 뒷통수가 뜨뜻미지근 한데, 안철수가 움직이고, 더군다나 반한나라당이라는 자기 노선을 확실히 그으면서 박원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슬쩍 움직였더니 5% 지지율이던 박원순은 당선권에 가장 가까운 후보가 되어버렸고, 그 자신은 박근혜와 대등한 지지율을 나타냈습니다. 박근혜는 뭐가 초조한거죠? 문재인-안철수-조국-박원순 연합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이죠. 이 넷은 합리적 보수에서 중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펙트럼에 걸쳐있습니다. 거의 '뭘해도 되는 조합' 입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병걸렸냐" 는 실언입니다.



겨우 하루. 안철수 지지율 역전 보도가 나온지 단 하루만에 자제심을 잃었어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그동안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르는데 고작 단 한 차례 지지율 역전에 공주님은 그만 발끈발끈 열매를 드신겁니다. 이게 뭘 뜻합니까. 박근혜는 이런 중압감에 그다지 강한 정치인이 아니란 겁니다. 



앞으로는 더할겁니다. 이미 무적의 대세라는 신화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수비적인 위치에만 머물 수가 없습니다. 정책을 보여줘야 하고, 이슈를 만들어내야 해요. 신중하고 안정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전반전도 끝나기 전에 3-0 으로 승세를 굳혀놨기 때문. 큰 실책만 하지 않으면 대권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아, 다 왔는데, 이제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형세가 이상해져 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그대로 다 보여버렸습니다. 겨우겨우 잊혀졌던 "싸우자는 거에요" 발언도, 기억속에 되살아났습니다. 기껏 쌓아올린 '신중한 정치인' 이라는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자기한테 불리하면 발끈하는 정치인이 되어버린겁니다.



지금까지 박근혜는 안 보여주고 감추어두면 이기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제, 그것만으론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보여줘야 해요. 근데, 초조합니다. 이렇게 초조한데, 말실수, 더이상 안 할 수 있을까요? 보여주려니, 뭘 보여주죠? 그 속에 감추어둔 컨텐츠.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꼬였어요. 부자 몸조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일년이, 아주 지뢰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건, 안철수 까내리기, 조국 까내리기 밖에 없어보입니다. 까내린다고, 까내려질까요? 글쎄요. 망했어요. 박근혜 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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