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에 흥미가 생겼다. 모든 일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인 법. 그 계기는 시유의 〈천년의 시〉란 곡을 판소리를 전공하시는 분께서 판소리틱하게 부른 걸 들은 뒤였다. 링크는 여기. http://lyun.crecrew.net/15345

음악을 들을 때 날카로운 소리보다 둥글둥글한 소리를 좋아하는데 판소리식의 창법이 나이를 먹어 그런지 취향 때문에 그런지 거슬리지 않았다. 판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여겨 본격적인 공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선택은 두가지였다. 그 분야에서 유명한 거장(ex:안숙선 명창 등)의 판소리를 듣느냐 아니면 내 또래의 판소리를 듣느냐. 아무래도 수업 시간에 비디오로 본 판소리 영상이나 판소리 소설의 어휘를 경험한 본 바로는 좀 더 쉬운 접근 방법을 고려하거나 눈높이를 또래에 맞출 확률이 큰 젊은 명창이 더 끌렸다. 선입견이지만 나이가 있는 명창이라면 그런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보수적이지 않을까 싶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에서 하는 공연을 찾기가 힘들었다. 내가 아는 명창이라곤 고인이거나 신동으로 유명했던 유태평양 정도였기 때문이다.그냥 젊은 명창이건, 원숙한 명창이건 서울에서 하는 공연을 보자 찾아보니 역시 내가 관람을 원한 시기엔 공연이 없더라. 그냥 포기하고 유태평양군은 요새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해 찾아보니 무슨 대회에서 상을 탄 후 인터뷰를 한 기사가 있었다. 대학생활을 위해 단돈독 무대는 당분간 하지 않기로 했다는데 그 기사에서 유태평양군이 '이자람 선배의 창작 판소리 작업를 보면서 감탄도 하고요'란 언급을 하더라.

이자람이 누구지하고 찾아보니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란 곡을 부른 아이였고 그 아이는 자라 소리꾼이 됐다. 블로그에 이자람의 창작판소리에 대한 여러 칭찬이 보였고 인터뷰 역시 많았다. 그의 창작판소리는 둘이 있었는데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사람들》을 토대로 번안한 《사천가》와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토대로 번안한 《억척가》였다. 예전 교양 시간에 교수님께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잠시 언급하면서 그가 만일 한국에 들려 판소리를 봤었다면하며 매우 아쉬워하시던 기억이 났다. 해당 분야에 관심이 없어 모르겠지만서도 교수님께서 언급하실 정도면 이미 판소리와 브레히트를 잇는 실험 또는 논문은 예전부터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공연을 본 후 교수님께서 이 공연을 보면 뭐라 하실지도 궁금하더라.


퓨전이란 이름을 단 공연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대개 별 생각없이 이어붙이는 것도 같고 가끔 광고에 보이는 장면을 보면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하는 생각도 든다. 인터뷰를 보니 이자람이란 소리꾼도 퓨전이란 소리를 질색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인터뷰에서 그는 '먹고 사는 것만 생각했으면 퓨전 음악하면서 협연하고 몇백만원 더 받고'같은 발언이나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난 그냥 그렇게 퓨전, 컨템포러리 이렇게 불리다가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거리가 있어지겠구나'같은 발언을 보면 말이다. 사천가를 하고 싶어하는 후배 김소진 명창은 인터뷰에서 

"연출 선생님과 자람 선배가 먼저 대본분석이 중요하다며 많은 공부를 시켰다. 가령 역대 대통령들의 역사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어떤 사회문제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단지 소리만 하는 앵무새가 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직 어려서 이해를 못하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공감을 해야 전달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대본 분석에 애를 많이 썼다." 라고 하더라. 공연을 같이 본 K에게 말했다시피 마치 이것은 대학에 갓 입한한 후배에게 선배들이 하는 그런 일인 거 같아 꽤 재미있었다.   

이런 걸 보고 덕후라 하면 안되지만 인터뷰를 잇달아 보다보니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지고 자신이 하는 일에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다 판소리 공연이 매진된다 하니 퓨전 여부는 둘째쳐도 굉장히 흥미가 갔다.

http://music.naver.com/video/popupPlayer.nhn?videoId=95250 를 보니 재미있어 보여 해당 공연을 예매하려 했지만 당황스럽게도 매진이었다. 당연히 표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인기가 있다는 말이니 더욱 오기가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천가》보다 낫다는 《억척가》의 예매가 시작되자 앞뒤 가리지 않고 예매를 했고 그건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이자람의 창작판소리의 장점은 크게 두가지로 보였다. 첫째는 말이다. 말이 옛 말이 아닌 현대어라 알아듣기 쉬워 내용이 잘 들어온다. 둘째는 재미이다. 재미가 없다면 공연이 매진될 리가 없다.  

애당초 동반 1인이 당연히 시간이 날 줄 알았기에 공연 날짜가 다가와도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사정이 생겨 날짜가 안나거나, 또 다른 분은 사정이 생겨 공연을 보러가지 못했다.

공연장소가 용인인 줄은 몰랐기에 날이 다가오자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줄 그제야 알았고 또 장르를 판소리라 하니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관객인 나도 이런 고초를 겪는데 공연자는 오죽할까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클래식은 그나마 향유인구가 많아 주변을 뒤지면 찾아볼 수 있는데 판소리는 정말 희귀하다. 용인에 사는 친구 K가 관심을 보여 간신히 동반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포은아트홀에 도달하니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이 보였다. 심야 시간에 방송하는 유앤아이 무대로 인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대화도 잠시 들린 걸 보면 공중파의 힘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억척가가 시작하고 런닝타임이 3시간에 가까운 줄 알자 놀랐다. 2시간 가까운 공연인 줄 알았기에 놀랐고, 3시간 동안이나 소리꾼이 이끌어나간다는 걸 알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석에서는 판소리 공연에 대한 우려가 조금씩 들려왔다. 창작이자 퓨전 성격의 판소리지만 나처럼 판소리를 처음 듣는 관객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공연이 시작되자 난 조금 실망을 했다. 무슨 문제인지 시작 직후의 창(노래)에서 내용이 귀에 잘 안들어왔다. 공연 내내 이러면 곤란하다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적벽가의 일부인듯한 부분을 부르다가 전통적인 판소리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고 설명하며  웃음을 이끌어냈다. 우려와 달리 그의 창(소리)과 아니리(말)은 귀에 잘 들려왔다. 완급을 잘 조절했으며 감정의 표현도 대단했다. 외국 순환 공연을 다녀와 목이 정상이 아니라 했는데 그런 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 공연 전날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의 내용을 몰라 초반 50P 정도의 희곡을 읽다 왔는데 억척어멈이 돈에 눈이 멀어 흥정하는 사이 자식이 병사로 끌려가는 부분을 일인극으로 번갈아 보여주는 부분은 꽤 재미있었다. 연극이었다면 그 씬에서 등장인물 여럿에 의해 보여줄테니 말다. 말했다시피 이 공연은 퓨전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판소리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소리꾼인 이자람의 일인극으로 보여준다. 이걸 3시간 동안 하니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질리기까지 했다. 보통 판소리에서 완창이 몇시간인지 모르겠지만 판소리의 소리꾼들은 이걸 당연히 해낼테니 판소리 관객에겐 이런 장면은 새삼스럽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정통적인 판소리라 보기엔 몇몇 장면에서는 갸우뚱하는 부분도 있었다.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여러 음악을 사용하거나 무대를 활용하는 것 등이 그러했다. 공연 초반 관객석에 막걸리를 나눠주자 동반자 K는 크게 웃었다. 판소리에는 관객의 으추임새 역시 중요하다 들었다. 그래서 명창들의 공연을 가면 판소리 애호가들이 적절한 타이밍에서 추임새를 넣는다는데,  역시나 《억척가》역시 추임새가 부족하다 여겨졌는지 소리꾼이 극 중간 추임새에 대한 설명을 했고 그 후 객석에서는 추임새가 끊이지 않았다. 가장 많이 나온 추임새는 '예쁘다' 였다. 소리꾼이 창을 하면 거기에 예쁘다라는 추임새가 객석에서 계속 나오고 관객석에는 막걸리가 돌아다니고(....) 소리꾼과 관객이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손오공의 원기옥마냥 관객들에게 힘을 얻어 공연 내내 말과 노래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흥겨울지.     


런닝타임에 대해 우려를 했지만 3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인터미션에서는 객석에서 판소리가 재밌구나란 반응과 함께, 이걸 녹화해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직업병에 사로잡힌 교사분의 대화가 들리더라.(하지만 DVD나 CD 영상 발매가 아닌한 저작권 위반인데......)  저작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 있는 한편, 좋은 공연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심정이 나타난 대화였다. 오디오북이나 음반을 내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공연자와 기획자가 알아서 판단할 거 같다.

브레히트의 희곡을 연극으로 보거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희곡을 본 것이 아니라 자세한 비교는 하기 힘드니 감상은 여기서 마치겠다.  

《억척가》가 정통적인 판소리인가 여부에 대해서는, 정통적인 판소리를 제대로 접한 바가 없어 단언하진 못하겠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판소리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 판소리가 재밌고 판소리의 재미가 어떤 것인지를 관객에게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자람의 창작판소리 뿐만 아니라, 다른 젊은 소리꾼들 역시 관중들에게 보다 다가가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하고 여러 시도를 하는 모양이다. 다른 시도들 역시 흥해 사람들이 판소리 한번 보러갈래? 하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억척가》를 보고 이자람의 공연을 다시는 보지 않거나. 이자람의 공연만 보러다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다른 명창의 《사천가》를 보러 다니며 비교를 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나처럼 판소리 다섯마당도 한 번 도전해볼까나 하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도 1%라도 있다면 그걸로 족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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