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고 분해서 펑펑 울면서 왔어요

2012.12.20 00:01

해마 조회 수:1765

잭콕 한 잔 빨면서 방송 보려니 도저히 안 되겠어서 술집 직원한테 소리 꺼주고 노래 좀 틀어달라고 부탁하고 멍때리면서 개표 보고 있었어요. 그냥 멍하고 헛웃음이 나더라구요. 누가 했던 말처럼 이건 정말 행운일지도 몰라요, 한 국가가 망해가는 꼴을, 무너져가는 꼴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이 드문 지점에 있다는 것이요.

방송에서 확신, 뜨자마자 두 눈 똑바로 뜨고 당신들의 선택이 얼마나 이 나라를 조질지 다 지켜봐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나 우스워요. 이 망령이 진짜로 살아 돌아온 것이.


그런 헛한 마음으로 집에 오는데 누구는 울었다는 연락, 누구는 망했다는 연락, 이제 정말로 아프면 안되겠다는 연락, 이 치하가 끝나면 서른 줄인데 우리 청춘 어디갔냐는 말들... 을 하고 들으면서 오는데 거기까지도 괜찮았어요. 출구 나오니 민주당에서 내건 투표 독려 플랑이 걸려있더군요. 춥다고 투표 안 하시면 안 돼요. 브라우니 물어.



갑자기 너무 서럽고, 분해서, 엉엉 울면서 왔어요. 얼마전에 김근태의 "남영동" 일부를 일기에 베낀 적이 있어요. 너무 끔찍하고 소스라치는 글줄이지만, 잊어선 안 되는 글이라 적어놨거든요. 자꾸 그게 생각나는거에요.


"고통, 고문, 이런 고씨 돌림은 죽음의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의 핵심 정수인 것입니다. 저 칠흙같이 어두웠던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등계 형시들에 의해 불구자가 되고 목숨을 잃어가고 윤동주 시민이나 이육사처럼 옥사했던 이유가 이 참혹한 고문이었습니다..." 까지만요. 그가 어떤 고문을 어떻게 당했는지는 적질 못했어요. 차마 못하겠어서. 피곤해서.


그게 너무 서럽고 분하잖아요. 엄마랑 아빠는 꽤 하드한 운동권이셨어요. 전두환 치하에서 대학 나오셨을 때, 좋은 대학이라는 간판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뿌듯하실 때 공장가고, 데모해서, 형사가 집에 찾아와서 딸년 가두지 않겠냐고 윽박지르던 시기의 분들이세요. 아빠는 감옥 대신 강원도 어디메로 군인하러 갔었고, 엄마는 잡혀가진 않았지만 불같은 할아버지가 발목을 분지르겠다고 가두고 때리셨대요.


그런 엄마 아빠가 아직도 그때.공부하던 책들과 잡지를 버리지 않은 집에서 자랐어요 저는. 거실과 부엌 책꽂이에는 레닌과 맑스가(물론 전 한번도 안읽...) 꽂혀있는 집에서요. 부모님 친구들 중엔 운동권이라는 분들이 많죠. 그 대학 나오고도, 변변한 직장 구하지 못하신 분들, 그리고 끝내 병 얻어 돌아가신 분들... 친구분 장례식에를 다녀와서 왜 운동권 애들은 이렇게 불행할까, 말하던 엄마 앞에서 저는 아무말도 못했어요.


저도 그냥 흔한 겁많은 어린애니까요. 어떤 소요와 난장에도 제 목소리를 섞고 싶지 않은,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프레임을 피하려 들었으니까요.


왜 불행함과 가난함과 부끄러움과 분노는 그들의 몫이 아닐까요? 김근태의 말들을 생각하면서 펑펑 울면서, 이게 너무 분해서, 앞으로 그러지 않으려구요. 제 목소리 낼래요. 어떤 집단도 나는 싫다며 부러 피하는 대신, 그 비겁함을 직시할래요. 분하고 정말 서러워서...




집에는 한동안 정적이 흐르다 얼마전에 아빠가 티비를 켰어요. 다른 방송 다 제끼고 그냥웬 다큐멘터리를 보시네요. 속이 얼마나 상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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