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9년에 태어나 이명박이 취임하던 해에 대학에 입학했고 올해 스물 네 살의 백수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때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울의 너른 광장에 앉아 밤을 지새웠고,

집에 돌아와서는 웅크리고 앉아 피흘리며 두드려맞는 사람들의 사진을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2008년의 여름에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꺼칠했지만 환하게 빛이 났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목청 높여 이야기하고, 웃고, 울고 노래를 힘껏 부르던 기억.

덜컹거리는 휠체어들과 함께 홈이 많은 도시의 거리를 천천히 가로지르던 기억.

공중에 걸린 수많은 깃발들을 하나 하나 일별하면서 속으로만 인사를 건네던 기억.

서울이 그렇게도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겨울에는 용산이 타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죽었고요.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미사를 드리던 것이 떠오릅니다. 곁에선 다들 울고 있었어요.

새까맣게 타버린 남일당 건물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 올려다보면 크고 미끈한 건물들이 보였습니다.

서울이 그토록 무서운 공간이라는 것을 도로 깨달았어요.

 

그러고는 몇년동안 그 모든 것들을 다 잊고 살았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졌거든요.

맹목적으로 한 사람을 사랑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은 더 이상 제가 알 바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정말 세상것들이 조금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유폐된 채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희망버스란 것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작년 여름, 부산 영도에서 온몸을 쓰라리게 만드는 푸른 물을 흠뻑 맞았습니다.

몸이 아팠고, 허공에 있는 사람이 쓰러질까봐 무서웠고, 잡혀갈까봐 두려웠습니다. 저는 겁이 많거든요.

그때 이후로는 다시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트위터나 듀나게시판 등에서 현장의 소식들을 몰래 훔쳐보곤 했지만, 보는 게 다였죠.

어떤 것도 내 행복을 방해할 수는 없다! 나는 절대 세상것들의 불행에 감염되지 않겠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그악스럽게 일상의 테두리를 동여맸습니다. 혹여라도 뭔가 스며들까봐 벌벌 떨면서요.

그리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끔찍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저따위 생각들부터가 다 잘못된 거였어요. 어리석게도 저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올 겨울은 제 사소한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절입니다. 죽고싶다는 생각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잘도 흘러갔어요. 

 

사실 어제 투표장에 가기 전까지는 김소연 후보나 김순자 후보를 찍으려 했습니다.

노무현이 죽었을 때 슬프긴 했지만, 자기를 버려야 한다던 노무현의 뼈아픈 전언에 동의하기도 했으니까요.

마음이 지옥이니 대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어요. 물론 박근혜가 되는 걸 상상하진 않았지만...

뭐가 어떻게 되든 제 사랑만, 제 삶만 구출해낼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투표소에 가서 제 앞과 뒤에 길게 늘어선 나이드신 분들의 표정들을 보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발작처럼 문재인 이름 옆에 도장을 찍었고, 왠지 부끄러워져서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어제는 대선과 상관없는 일로 몹시 비참한 기분으로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틀어놓은 종편 채널에서 '최초의 부녀 대통령 탄생'에 감탄하고 있더군요. 

제가 처음으로 서울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곳에서 박정희의 사진을 들고 환호하는 이들의 표정도 보았습니다.

도저히 버티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얼굴에 물만 묻히고 집밖으로 나와 지금껏 종일 떠돌았습니다.

초콜릿 몇 개로 지겨운 허기를 견디고 PC방에서 시간을 죽입니다. 제 몸에서 슬슬 악취가 납니다.

 

제 첫 대통령 투표는 이렇게 맥없이 끝났습니다.

저의 20대 초반은 꼼짝없이 이명박과 함께 흘러갔습니다.

그에게 살의를 느낀 적도 있었지만, 때때로 그는 제 익살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살아남는다면 아마 박근혜와 함께 20대 후반을 천천히 건너가겠지요.

오늘 우연히 발견한 최승자의 시가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무엇보다도,

다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

 

 

...

 

사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죽고 싶기도 합니다. 겁이 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사무치게 듣고 싶네요.

전화할 수 없습니다.

 

하하...

두서도 없는 글타래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의 힘으로 써내려간 이 부끄러운 글은 필시 곧 지우게 되겠지요.

한시간쯤만 더 버티면 차가 다니겠네요. 다시 집으로 가야겠습니다.

 

모쪼록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좋은 겨울들을 보내시길 빕니다.

박근혜는 바보니까 우리가 다스릴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농담.

부디... 모두가 나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올 여름의 인생 공부

                                                      
                                                                최승자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 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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