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 바낭] 제가 연애하는 얘기

2012.07.14 09:08

말라 조회 수:6969

 안녕하세요. 


 저 연애한다고 너무 소문내고 싶은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괴로워하다 

 이른 아침부터 바낭의 성지 듀게를 찾게 되었습니다.

 (...) 

 오늘은 제가 어떻게 연애를 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 작년 가을, 친구가 모처에서 현 애인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소개팅은 아니었고, 다만 친구와 술을 마시다 2차 장소를 잡으면서.

 "거기 가면 내 친구 xx가 있을지도 몰라." "왜?" "원래 거기 있어."

 그렇구나 술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인가 보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그 술집에 가 보니 과연 거기 있었습니다; 합석을 했지요.

 당시 서로에 대한 첫인상:

 애인->저: '뭐지, 엄청 여자같은 옷 입은 애가 엄청 큰 문신을 하고 있다, 안어울려...

 그런데 말투는 또 엄청 조곤조곤하다... 안어울려... 뭐지... 이상해.'

 저->애인: '뭐지, 처음보는 사람이 정색하고 손톱물어뜯지 말라고 지적한다...

 무례해... 게다가 손톱을 물어뜯는다고 손등을 때린다... 뭐지... 이상해.'

 

 그날은 모두들 너무 취해 자리를 파하고 나니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도 기억 안나고

 그 후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2. 겨우내 현 애인과 저는 각자 엄한 사람들에게 작업을 걸다 까이기를 반복하며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음. 


 3. 올 봄, 처음에 그 분을 소개시켜준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현재의 애인이 합석.

 다시 만나니 재미있는 사람 같습니다.

 즐겁게 놀다 자정이 지나자 친구가 먼저 자러 들어간다며 

 '둘이 좋은 시간 보내' 하고 찡긋 웃더니 조명을 낮추고 들어갑니다. 

 멍석을 깔아주었으나 둘 다 별 생각 없습니다.

 현 애인이 술을 마시다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길래 잠시 음? 하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냥 자기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것 같습니다.

 선곡에도 배려가 없습니다 (주로 우중충한 이별노래) 

 게다가 미묘하게 세대차이도 납니다 (일곱 살 차이)

 이야기는 즐겁고 분위기는 좋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좀 너무 즐겁고 분위기 역시 좀 너무 지나치게 좋은 바람에;

 게다가 둘 다 술을 참 잘 마시는 터여서; 

 술이 모자라면 편의점에서 술을 사 오면서 아침 열 시까지 계속 마시다가

 다음 날 숙취에 괴로와하며 셋이 함께 해장하고 헤어집니다.  


 4. 좀 잘 될 것 같기도 한 마음에 연락을 해보고 싶지만 그런 거 할 줄 모릅니다. 

 카톡을 보내보지만 날씨 얘기...-_- 날씨에 대해 얘기했더니 날씨에 대한 답이 옵니다.

 할 말이 없으니 접습니다. 


 5. 상대방도 좀 잘 될 것 같기도 한가봅니다. 어느 날 새벽 만취전화가 옵니다. 

 "지금 나올래요?" "헐 지금요?" "(신속히 술 깬듯)아니요. 나오지 마세요."

 다음 날 결례를 저질러 미안하다는 정중한 사과전화가 옵니다. 

 그쪽도 접은 듯... 


 6. 한 달에 한 번 빈도의 아무 내용도 없는 안부문자를 주고받습니다.

 내용: "다음에 한번 봐요" "그래요 한번 봐요" (끝) 


 7. 늦봄에 전화가 옵니다. "n일 n시에 시사회 당첨됐는데 갈래요?" "네" 


 8. 영화를 봅니다. 


 9. 술을 마십니다. 재밌네요. 


 10. 술을 또 마십니다. 차가 끊깁니다.


 12. 술을 또 마십니다. (이 모든 서사에서 유일하게 긴장감 넘치는 순간) 


 12. "...우리집에 가서 한 잔 더 할래요?" "(말 끝나기도 전)네!" 


 13. 사귑니다. 


 14. 소문을 냅니다.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

 이렇게 상호간에 아무 것도 안 하고도 연애를 할 수 있습니다...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쓰고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없네요. 


 이제 막 두달째 잘 사귀고 있습니다. 둘 다 성격이 나빠서 열렬히 싸웁니다만,

 애인은 화날 때 소리를 지르고 저는 화나면 아무데서나 웁니다만,  

 애인은 피가 확 솟구치는 고혈압이 있고 저는 가아끔 기절하는 저혈압입니다.

 싸울 때 상대방은 뒷목을 잡고 저는 밥을 먹습니다 (일단 싸울 기운을 보충해야 함) 

 밥은 같이 먹어야 하니까 오래 싸울 순 없습니다... 

 기왕이면 고혈압에 좋은 음식으로 먹는 게 좋겠지요... 


 저는 연애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죽겠지 라는 생각을 가진 낭만주의자고

 애인은 연애가 끝나면 비참한 인생을 영원히 살아가겠지 라는 생각을 가진 회의주의자입니다

 즉 연애가 끝나면 둘 다 각자의 가치관에 준하여 몰락할 것 같지만

 중요한 건 인생에 연애 말고는 딱히 기대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데다가

 연애를 잘 많이 하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 만나니 

 연애는 되게 열심히 합니다. 

 

 애인은 홍상수를 좋아하고 저는 라스 폰 트리에를 좋아합니다. 

 즉 취향이라는 면에서 다른 우주에 있으며 심지어 서로의 취향을 약간 경멸함ㅋㅋㅋ

 그래도 애인이니까ㅋㅋㅋ연애하니깤ㅋㅋ그것도 엄청 오랜만에 하니까ㅋㅋㅋ

 이때 안 보면 언제 보는가 단 한번만 참자는 심정으로

 서로가 보고 싶은 영화를 같이 봐주기도 합니다. 

 <멜랑콜리아> 보는데 제 애인이 마지막 장면에서 빵 터져서 (나와서도 계속 웃음ㅠㅠ)

 굉장히 창피했는데, 전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 홍상수 영화를 안 봤군요.

 저는 누가 눈 못 감게 눈꺼풀 묶어두고 24시간 홍상수 영화 연속상영하는 것이 

 악몽 레퍼토리 중 하나일 정도로 그의 영화를 매우 괴로와하는데,

 제 애인은 <멜랑콜리아>가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잘 사귑니다... 

 

 애인은 연극을 하고 저는 글을 쓰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현실감각은 없습니다만   

 직종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둘 다 가난하고 아마 앞으로도 가난할 듯 하여서

 일자별 세일을 알리는 마트 전단지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생선가스 5개 2000원! 순두부 4개 1000원! 같은 걸 잘 챙겨 싸짊어진 다음에 

 그런 걸로도 육첩반상을 차려먹는 게 현실감각이라고 생각하며 지냅니다.  

 글 쓰는 자랑 사귀는 제 애인은 뭐 얼마나 재밌을지 모르겠지만

 배우랑 사귀니까 약 50명이랑 돌아가며 사귀는 것 같아서 신나네요,

 연인 간에는 깨알같은 상황극이 즐거움을 더해주는데(?)

 상대방이 퍼포먼스를 잘하니까 되게 좋군요. (저는 설정을 잘 짭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의 행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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