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4 14:32
이 책을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오다가다 여기저기서 자주 마주친 책이었으나 그동안 어쩐지 손이 안 가서 지나쳤지요.
앞서 읽은 서머싯 몸 책에 아쉬움을 느껴 한번 더 만나보려고 대표작이라는 이 책을 읽었네요.
작가인 화자가 계획한 것은 아니나 어쩌다 자꾸 얽히게 된다는 식으로 예술가의 삶을 추적하는 소설입니다. 우리 일반인들의 머리 속에 인습 파괴적이고 행,불행을 아득히 초월한 예술가 상을 입력시키는데 일조한 소설 중 하나입죠.
아래에 이입하기 어려운 부분들 잡담을 조금 해 봅니다.
고갱의 삶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대강 여기저기서 읽어 알고 있는 고갱의 실제 행적 중의 현실적인 면모(그림 투자가로 돈을 벌기도 했고 당시 화가들과 어울리며 습작 시절을 가짐)와 지저분함(타히티에서의 어린 여자들)을 쳐내고 동선 정리를 하였네요. 그러면서 인물의 전설적인 면을 더욱 뚜렷하게 살렸고요. 고갱이라는 인간이 아니고 예술가 고갱의 특정 부분을 강조한 책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내용 전개상 무리로 느껴졌던 것은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하루 아침에 가정과 직장, 나라를 떠나 파리로 가서 거의 빈털터리로 화가로서의 새인생을 산다는 앞 부분이었어요. 작가가 주인공 화가를 영국인으로 설정하면서 고갱의 삶을 이어받게 하는 연결 지점에 무리수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점을 서머싯 몸도 알고 있었어요. 소설의 삼분의 이 지점에 화자이자 기록자가 언급하고 있거든요. 원인을 모르니 모호하게 쓸 수밖에 없다면서, 가장으로 증권 중개인으로 살 때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어떻게 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해요. 사실이란 소설처럼 그럴듯하게 짜맞춰지지 않는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대로 옮기면 '어떤 기인 한 사람에 대해 아는 사실을 그대로 적는 게 아니고, 한 편의 소설을 쓰고 있다면 그와 같은 심경 변화가 일어난 이유를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꾸며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 구멍에 대한 알리바이를 써놓았네요.
그런가요... 저는 화가가 되겠다는 결단이야 속사정이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고(남 모르는 어릴 적부터의 꿈이라서...그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기타등등) 보고 굳이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인습을 벗어난 야수같이 되는 것도 하루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일까 싶거든요. 파리에서의 스트릭랜드는 조금치의 허례허식적, 허영적, 가식적 대화도 묵살하는 사람이며 인간적인 애착 같은 것을 경멸하는 사람으로서, 고흐가 귀를 자르게 했던 무신경한 고갱이 되어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고갱은 가족과의 단절이 이 소설과 같은 식이지 않았고 밀고 당기고 인연이 끊어지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린 것으로 압니다. 이 소설에서는 17년간 가정을 이루고 증권맨 생활을 했던 영국에서의 지인들은 모두 짐작을 못 하던 인격이 영불해협을 건너자마자 드러납니다. 이 점은 이상하였어요.
인간이 아닌 예술가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그 구분의 선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비본질적인 인습과의 적당한 타협을 역겨워하고 그 결과로 겪는 고난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닌다는 점은 예술가에게 갖는 전통적인 존경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오는지? 증권 중개업자가 예술가 중의 예술가가 되는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하고 읽고 싶은 대목이네요.
누가 보더라도 고갱의 삶이 바탕임이 확실한 소설인데 타히티에서 말년을 다룬 후반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도 솔직히 난감했어요. 소설은 타히티에선 일부일처의 삶을 살다 마감한 것으로 마무리되더군요. 이런 것을 보면 실제 인물을 다룬 작품이 위험하다 싶습니다. 감상에 있어 흔쾌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해나 복잡한 심사가 따라 오게 되니까요.
20년대 소설이며 야생의 생활을 편하게 여긴 인물이 주인공이라 해도 '여자들이란-' 소리가 심하게 그 입에서 자주 나오더군요. 실제로 고갱은 어땠을까.
2023년도에 몸의 소설 세 편을 뒤늦게 읽었네요. 선호를 표시해 보면 [달과 6펜스] >>[면도날]>>[인생의 베일] 입니다.
2023.12.04 14:49
2023.12.04 16:23
그 무리수를 두지 않으려면 차라리 실제 인물 고갱(쓸 때마다 '고갱님' 생각이...)을 더 충실하게 반영을 해서 화가를 프랑스인으로 두는 게 나았지 싶지만....화자인 작가와의 인연을 이리저리 엮으려니 영국인 설정으로 간 것인지? 암튼 인간성 자체가 그렇게 짐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달라지니 뭔가 어색하였습니다.
저도 예술가를 신비화한 것 같아서 제 취향엔 안 맞았어요. 세월이 달라져서 그런지 제가 나이먹어 그런지 설득이 좀 안 되더군요.
2023.12.04 17:10
글 잘 읽었어요. '인문학적 교양'에 관심이 많아 강의를 자주 들으러다녀요. 선생님께서 파리에서 '후기 인상파'로 박사 과정을 수료하셔서 그런지
이때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하셔요. 고흐가 고갱과 살다 결별한 사연은 이래요. 형이 매일 혼자 있으니까 테오가 고갱에게 돈을 주고 가있으라고 부탁을 해요.
그런데 고호는 깨어있으면 "예술혼이..." 어쩌고 하루종일 말 시키는 스타일이었나봐요. 같이 있으면 피곤하죠. 그러다가 싸움이 났는데 고갱이 고흐한테
"동생한테 빌붙어살고"... 이랬다나 봐요. 그리고 다음은 아시는 이야기여요.
가수 심규선의 동명의 곡이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thoma님 그렇게 들리시나요? :)
이건 그냥 읽어보시면 되요.
2023.12.04 20:48
고갱에 대해서는 책으로 접한 것은 없고 여기저기 조금씩 주워 읽은 것이고 최승자 시인이 번역한 어빙 스톤의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를 오래 전에 읽었어요. 그때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확인해 보니 작년에 개정되어 [빈센트 반 고흐]로 나왔네요.
2023.12.04 20:13
어렸을 때 분명히 읽었는데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나고 내용은 하나도 생각 안 나는 책들 있잖습니까. 이 책이 제겐 그런 (수많은) 경우들 중 하나에요. 이 글을 읽기 전까진 이게 고갱 이야기라는 것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런 걸 '읽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ㅋㅋ 이제라도 다시 보는 게 좋겠지만 그러기엔 '분명히 읽었다!'라는 기억이 은근 방해를 하구요. 네. 결국 책 안 읽으려는 핑계인 건 맞는데요. 또 동시에 진심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뭣보다... 본문에 적어주신 걸 보면 다시 읽어볼 의지도 안 생겨요. 디테일을 보면 인상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넘나 비호감 그 자체네요...;
2023.12.04 21:30
제가 책을 읽고 나서 짧게 나마 글을 쓸 때 마음에 남는 의문점 중심으로 쓰는 경향이 있는 거 같습니다. 당연히 좋은 면을 확대하여 보고 싶은 책도 있지만 이상하다, 의아하다 이런 소감을 쓰게 되네요. 사람이 삐딱한가...봅니다.ㅎ
오래 전 책이라고 해도 시간 흐름과 같이 가는 책도 있는데 이 책은 특정 시기와 시야에 속한 느낌은 들었습니다.
2023.12.05 15:09
초딩때 소년소녀용으로 편집된것을 읽었는데 읽기는 잘 읽었지만 10대초반 소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예술가 아닌 저로서는 스트릭랜드같은 사람 별로지만
그의 삶을 존중해야죠
2023.12.05 17:20
스트릭랜드의 타히티에서 삶과 죽음은 경이롭고 찡했는데 자꾸 실제 인물 고갱이 어른거리며 감동을 방해하는 현상이.
2023.12.06 15:34
저는 이 책 오래 전에 읽고 어린 마음에 이런 이상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어디선가 중년을 망치는 책 몇 위! 해서 [달과 6펜스]! 가 당당히 올라와 있던 게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3위 안이었던 것 같고... 현재 내용도 잘 기억 안 나는 흐릿한 이미지는 '자연인'입니다. 아마 그 책들 중 하나는 [그리스인 죠르바]였던 것 같네요 ㅋㅋ. 모든걸 다 집어 던지고 자기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삶이라는 로망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뭐... 인생은 한 번 뿐이니까 시도해볼 수도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이 돼요.
2023.12.06 15:45
중년을 망치는 책, 자연인, 웃깁니다.ㅎㅎ
맞아요. 모든 것을 박차고 대차게 나오는 사람 앞에서 화자가 - 그래도 가족은? 그래도 양심이 있지? 이런 소리를 하는데 어찌나 부실한 소리로 느껴지던지요. 그나마 작가라는 사람이.
인상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간만에 아는 내용으로 thoma님의 글에 댓글을 달 수 있으니 좋군요!
지적해주신 부분은 저도 지금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네요. 그 때는 그냥 초현실적인 변화라고 여겼는데... 한 인간의 인간사를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그 부분은 알 수 없는 걸로 처리를 하는 게 좀 치팅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술혼"이라는 것을 너무 판타스틱하게 과장한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고갱이 말년에 어린 소녀와 매독에 걸린 채로 그냥 살아가는 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