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얘기 아녜요. 일본 애니메이션판 <빨강 머리 앤>입니다.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매튜와 마릴라가 이 아이에 대한 확신이 채 생기기 전의 사건일 겁니다.

 

마릴라의 예쁜 브로치가 사라져요. 앤이 가고 싶어하던 소풍을 앞두고 벌어진 일인데요. 소풍에서 아이스크림이라는 낯선 음식물이 제공될 예정이라 앤은 엄청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어요.

 

앤은 아무도 없을 때 거울 앞에서 브로치를 착용해 본 사실이 있고, 브로치의 실종에 대해 추궁을 받습니다.  아무리 브로치를 제자리에 두었노라 얘기해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고, 실토를 않는다면 소풍을 못 간다는 엄명이 떨어져요. 이야기할 때까지는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나 그럴 겁니다.

앤은 소풍 당일인 다음날 거짓 자백을 해요. 자신이 브로치를 들고 나갔다가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꾸며서 그럴 듯하게 하지요. 꾸며낸 이야기를 끝내고 "소풍을 갈 수 있나요? "물었을 때, 안 된다는 단호한 대답을 듣습니다.

마릴라는 '네가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소풍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고 해요. 못된 아이라구요. 약속을 간단하게 어겨요.

 

앤은 주먹으로 침대를 치며 대성통곡합니다. 마릴라는 앤의 이런 반응에 혀를 내둘러요. 미친 애라고 생각하지요.

앤은 식사도 거르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힙니다.

(같은 시간, 단짝 친구 다이애나는 소매가 볼록한 새 옷을 입고, 엄마가 챙겨주는 간식을 들고 소풍을 가요. 즐겁게.)

 

오후에 마릴라는 브로치를 의외의 장소에서 찾아요. 자신이 그리로 옮긴 걸 잊은 거지요.

 

마릴라는 앤에게 늦었지만 소풍을 가라고 합니다.  앤은 냉큼 소풍에 합류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요. 다행히 아이스크림이 제공되기 전에 도착하구요.

 

 

본론은 여기서부턴데요.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나라면 결국 소풍 가기를 거부했을 거야, 생각하거든요.  망쳐진 느낌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날을 좁은 방에서 종료시켰을 거야, 그런 생각이죠. 우연찮게 두어 번 보게 됐는데, 매번 그랬군요. 그 생각을 하고 나면 또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요.

이 천성은 무엇일까 생각해봐도 정체가 뭔지 잘 모르겠군요.  아이스크림을 맛볼 기회도 보트를 탈 기회도 결국 스스로 내던지고 마는 격인데, 행복해지기 어려운 사람인 걸까, 싶은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완벽주의일까, 글쎄요. 불합리와 부당함에 대한 예민함일까, 글쎄요.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어둠'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마릴라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고, 거짓 약속에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고, 소풍에 이미 늦었다면 가고 싶지 않을 것이고, 억울할 것이고, 나를 의심한 이가 미웠을 것이고, 이유는 많아요. 가고 싶지 않군요.

무언가가 망가진 느낌을 떨치질 못하고, 남은 가능성을 내던져버렸을 이 인간은 어쩌면 불행이 천직인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놀랍게도 그런 생각을 하네요. 좀 오바스럽긴 한가요?

신나게 소풍에 가는 앤은, 이미 와있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앤은, 정말 낙천적인 아이일까, 미치도록 아이스크림이 필요한, 절박한 아이일까는 잘 모르겠지만요.

 

 

여러분이라면, 그런 날, 그런 소풍에 갈 수 있나요? 궁금합니다.

 

 

 

 

 

 

+

답을 받기에 너무 늦은 시간일까요.

아, 왜 이리 더운가요. 비라도 좍좍 쏟아부었으면 싶은 밤이네요.  답답하고 갑갑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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