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건맨의 연말 트랙 창고 대방출

2011.12.11 23:23

lonegunman 조회 수:2144





아직 엠피쓰리가 통용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음악 공급책이었던 저는

때마다 한 번씩 가지고 있던 음반에서 한 곡씩 엄선해 정성들여 구운 씨디를 돌리곤 했었죠

그리고 어느 겨울, 연말이래봤자 별 다를 것 없고 딱히 별 다를 걸 바라지도 않는 제 인생에도

유난히 북적이던 시절이 있어 캐롤 특집 씨디를 반포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참담하게도

'크리스마스에 혼자 캐롤 듣다 자살할 것 같애'였지요

제깐에는 아주 따뜻하고 온화한 곡들이라고 생각한 곡들이, 캐롤치곤 너무 조용하고 우울한 곡들이었던 거예요, 취향이란 참.

감안하고 들으시라는 말씀입니다. 창고 대 방출! 론건맨의 필청트랙들이 이어집니다






첫 곡은 다른 곡일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 집에 굴러다니던 어디서 주워 온 샘플 씨디들이 있었는데 

퀄리티가 불균등해서 들을만한 앨범을 골라내기란 쉽지 않아 그냥 영영 굴러다니고만 있었죠

나중에 재즈 음악을 좀 접한 뒤 우연히 자켓을 보니 등록된 아티스트들 면면이 예사롭지 않은 거라

그렇게 집어든 한 여름의 샘플 씨디는 무려 콜롬비아사에서 반포한 크리스마스 앨범이었습니다

그 후로 이 앨범은 제겐 그냥 캐롤의 스탠다드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나중에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가 원래는 빠르고 경쾌한 곡이란 걸 알게됐을 땐 엄청난 컬쳐쇼크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 유려한 멜로디에 그토록 경박한 템포라니! 이건 뭔가 잘못됐어! 세상이 잘못됐어! 이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야!

아직도 렛잇스노의 빠른 버전들은 뼛속 깊은 거부감이 들어요. 이건 잘못됐어! 나한테 왜 이래!

맨하탄 트랜스퍼의 렛 잇 스노우입니다 (저에겐 이게 스탠다드라고요. 하지만 현실은 레어트랙, 심지어 유튜브에도 없어!)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 / manhattan transfer






캐롤이면 머라이어느님이죠

아무래도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떠올리는 사람이 가장 많겠지만

저의 베스트 트랙은 뭐니 뭐니 해도 'hark the herald angel sing/gloria' 메들리입니다

몸집이 보통 사람의 세 배 정도 되는 흑인 누님 스물 여섯분이 성가복 입고 녹음했을 것만같은 코러스는 말할 것도 없고

핡에서 글로리아로 넘어가며 찍는 '글로'의 하이노트부터 한 호흡으로 하강하는 스케일 이후

전조된 다음 아까 그 흑인 누님들이 성가복 속에서 일인당 세 명으로 분열되어 불어난 것같은 코러스의 물량공세를 지나

리타르단도 뒤에 바로 붙는 '핡'의 하이노트는 아아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천국 갈 것 같아요

볼륨을 한껏 높이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지상의 소리가 지붕을 뚫고 천상에 닿는지 천상의 소리가 지상으로 내려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

뭐, 요즘 귀엔 좀 촌스러울 수 있겠지만 전 완전히 취해버립니다


hark the herald angel sing / mariah carry







아무래도 미국에서 물 건너온 기념일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무엇보다도 미국식의 재즈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앨리 맥빌의 사운드 트랙은 뭘 갖다 붙여도 제법 성탄절 분위기가 나요

그런 마당에 앨리 맥빌 캐롤 앨범이라면 말 다 했죠. 그 한 장만으로도 꽤 그럴듯한 배경음악이 돼줄 겁니다

웬만한 섹스어필하는 여가수는 다 한 번씩 불러봤다는 산타 베이비지만

제가 가장 선호하는 건 칼리스타 플록하트 버전이예요, 과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가사가 힘을 잃지 않을만큼 딱 적절히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전 다른 가수 버전들은 대체적으로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santa baby / calista flockhart

(산타 귀염둥이

내 양말은 땅문서랑 수표로 채워주시겠어요?
서명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산타 큐티,
오늘 밤 굴뚝 아래로 어서 내려와줘요

어서 와서 내 크리스마스 트리를 
티파니의 보석들로 장식해줘요
나 정말 자기를 믿어요
어디, 자기도 날 믿는지 한 번 볼까요)






분위기를 바꿔서 카운팅 크라우즈로 가봅시다

서울이 평소엔 잊고 사는 무릎 뒷쪽같은, 그러니까 서울 어느 구석 석계역이라는 음습한 지하철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개발됐을테니 과거형이에요)

어디서 공사하지 않아도 먼지가 날리고, 대구의 건축 현장에서 생성된 톱밥의 최종 목적지가 거기라도 되는 것 같은 아무튼 그런 곳이었죠

언제나처럼 땅만 보며 아마도 흔한 집착이나 보상 심리같은 것들을 꼬리처럼 질질 끌고 고가도로 아래를 지날 즈음이었나

어디서 하얗게 바랜 잿가루가 날리더군요

가지가지 하는군, 이번엔 뭐 태평양을 날아왔나, 성가신 마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 그 해의 첫 번째 눈송이였습니다, 그렇게나 가늘고 볼품없게

눈송이는 계절의 논리로, 음악은 플레이어의 논리로 저마다 각자 흘러가고 있는 와중에

우연히도 그 순간, 석계역과 고개를 든 나와 첫눈과 싱크가 맞게 흘러나온 노래는 카운팅 크라우즈의 'holiday in spain'

2분 38초 이후, '아이 메이...'하는 리타르단도 바로 뒤에 '할러데이 인 스페인, 아아 아아, 할러데이 인 스페인, 아아 아아'하는 코러스가 나옵니다

그 코리스의 두 번째 '할러데이 인 스페인'을, 그 중에서도 '스페인'의 음을 저는 눈물 나도록 좋아합니다

그 음이 나오기만을 기다려요, 쓸데없이 디테일해서 죄송합니다

이쯤되면 저는 리타르단도 덕후인 걸까요, 코러스 덕후인 걸까요


holiday in spain / counting crows

(등 뒤로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이 어린 소녀가 미쳐버리도록 다른 누군가에게로 날아가버려야지)






탐 웨이츠는 제겐 겨울 가수예요, 추위가 없는 세상에는 탐 웨이츠도 없을 겁니다

전혀 보온 안 될 것 같은 모직 코트의 깃을 세우고 하얀 입김을 뿜으며 무성의하게 중절모를 얹고 선 탐 웨이츠의 막연한 이미지는 제게만 유효한 건 아닐 거예요

영화 '스모크'의 절정,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삽입된 'innocent when you dream'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제가 들려드릴 곡은 'christmas 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입니다

유튜브에 검색하면 나오는 사일런트 나잇과의 메들리 버전은 보고 있으면 정신줄 놓고 그냥 입이 떡 벌어져 침으로 고드름이 얼어요

네 개의 자아가 있어서 나레이션하는 탐 웨이츠의 자아, 노래하는 탐 웨이츠 성대의 자아, 피아노치는 오른손 왼손의 자아가 각자 자기 할 일을 해나가며 서로 가끔 한 마디씩 툭툭 던지면서 키득거리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제가 링크한 건 원곡이에요

원곡의 피아노 연주는 제가 감히 세상 모든 피아노 연주 중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들으면 글쎄, 특별할 건 없지 않아?라는 반발심을 일으킬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래요

그러니까- 아마도 70억 인구의 평균보다는 많은 음악을 들었을 제가 손에 꼽을만큼 좋아하는 탐 웨이츠의 목소리가 순간 순간 지워져서 안 들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탐 웨이츠의 목소리도 곡의 멜로디도 미치도록 좋아요, 그런데 가끔 그게 지워질만큼 피아노 연주가 좋다고요, 그런데 그게 보컬이나 선율이 후져서가 아니라고요, 맙소사, 그런데 가사를 읽어보면 오, 신이시여



안녕, 찰리
나 임신했어요
유클리드가의 변두리 9번 거리에 살아요
그 더러운 책방 윗층에서요
마약도 끊고 술도 안 마셔요
남편은 트럼본 연주자인데 철도 회사에 다녀요

날 사랑한다나봐요
자기 아들도 아닌데
친자식처럼 키워주겠대요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반지까지 끼워주던걸요
토요일 밤엔 늘 같이 춤을 추러 가요

사실은요, 찰리
주유소 앞을 지날 때면 당신 생각이 나요
당신이 쓰던 머리 기름 때문에요
나 아직도 'little anthony & the imperials'의 음반을 갖고 있는데
누가 플레이어를 훔쳐가 버렸지 뭐예요
당신도 아직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나요

이봐요, 찰리
마리오가 잡혀갔을 땐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다시 가족들과 살아볼까 해서 고향 오마하로 돌아가도 봤지만
내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감옥에 있더군요
그래서 다시 미니아폴리스로 왔어요
이제 여기 정착하려고요

있잖아요, 찰리
사고 이후 처음으로 나 행복한 것 같아요
마약 사는데 탕진한 돈만 있었어도
중고차 판매점 하나쯤은 살 수 있었겠지요
그럼 매일 매일 기분에 따라 다른 차를 타고 드라이브할 수도 있었을텐데요

아.. 찰리
미안해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남편 같은 건 없어요
트럼본이 다 뭐예요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어요
자기가 좀 꿔주면
가석방으로 나올 수 있을 텐데..
돌아오는 발렌타인 데이 쯤엔 말이에요


christmas 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 tom waits







여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잘 따라오신 분들은 문득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뭐, 성탄절에 혼자 듣다가 자살할 정도는 아닌데? 

실패의 경험이 있는데 당연히 좀 그런가 싶으면 뺐죠, 메들리로 몇 곡 나갑니다, 취향 존중 부탁



away in manger / bright eyes



 

one special gift / low



 

o come o come emmanuel / belle and sebastian



 

that was the worst christmas ever / sufjan stevens



 

wonderful christmas / tom mcrae




...여전히 전 노홍철 버전으로 반박하고 싶군요

아닌데? 아닌데? 크리스마스 분위기 완전 나는데? 좋은데?





그럼 이번엔 조증으로 빠져볼까요

연인과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입을 맞춰 부르는 신나는 돌림 노래 '12 days of christmas'의 19금 버전

잭 블랙을 소환합니다


12 drugs of christmas / tenacious d

(크리스마스의 열 두 번째 날

나의 진실한 연인은
열 두 명의 마약쟁이 애들과
열 한 송이의 환각 버섯과
열 알의 마약과
아홉 캡슐의 환각제와
여덟 스푼의 코카인과
일곱 방울의 몰핀과
여섯 가치의 담배와
다섯 개의 발륨과
사 그램의 하시시와
삼 파운드의 마리화나와
이 백 알의 붉은- 그리고 
한 알의 노란 엘에스디를 선물해주었다네)





그 후론 사슴들이 그를 매우 사랑했다는, 루돌프 사슴코의 결말이 너무 비굴하다고 느끼셨다면

또 한 명의 잭, 잭 존슨이 전해주는 루돌프 사슴코의 진짜 결말을 들어보세요


rudolph the red nosed reindeer / jack johnson

(그러나 루돌프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네
그는 말했지
'너희들의 멍청한 게임에 놀아나지 않겠어
바로 어제만 해도 날 놀려대던 너희들이
어떻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니?')






창고 대방출이라고 선언해놓고 내용물이 너무 조촐한가요?

사실 선곡에 다른 기준은 없고 제가 떠들만한 곡들로 꾸린 겁니다, 빠져선 안 되는 곡들이 많이 빠졌죠 덧붙일 말이 별로 없거든요

크리스마스에 소년 합창단들은 언제나 옳지만 어떻게 한 곡을 딱 꼽겠어요, 빈소년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올릴 걸 그랬나요? 그건 올해도 지겹도록 듣게 되실 거잖아요, 아무리 들어도 정말로 지겹진 않겠지만 :)

아무튼 내용물 부실의 책임을 통감하며 추천사를 날리자면 크리스마스는 소년 합창단들에게 맡겨도 좋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건대 전 언제나 파리 나무 십자가파예요, 소년들의 목소리엔 반주 따윈 필요없어!

다른 팁이라면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는 남자 보컬의 목소리로

'the christmas song'은 여자 보컬의 목소리로 듣는 게 진리입니다 (기준은 무슨. 아니면 마세요)







배경음악을 고르는데 도움이 됐으려나 모르겠네요, 스크롤만 길어졌군요

그냥 쭉 내려버리셨다면 아무 곡이나 하나만 찍어 틀어놓고 일 보세요, 혹시 우연히 올 연말의 배경 음악을 찾아내실 수도 있지 않겠어요?


어쨌거나 여기까지입니다

자, 마지막 곡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요

뭔가 크리스마스 정신이 듬뿍 담긴 곡이 좋을텐데










오, 저 트리에 걸어 목을 맬 밧줄 하나 주게

나의 불행을 끝내는데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겠지

이런 크리스마스 시즌엔 죽어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은 법이지


오, 발판을 끌어다 줘

그리고 한때는 연말마다 위안을 찾아 헤매던 이 바보에게 속삭여주게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울어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은 법이라고


한쪽은 초록, 한쪽은 빨강색 벙어리 장갑을 끼고

공동묘지를 향해 홀로 걸었네

내쉬는 숨은 눈송이가 되어 떨어지더군

참으로 고딕스러운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술병은 바닥났고, 썰매는 평지에 다달았고

내 침대 위의 스트리퍼는 추하고 뚱뚱해

수술은 모두 뒤엉켰고 그보다 끔찍한 건

나의 징글벨은 더이상 쟁글대지 않는다는 것


일 년 중 이맘때면 난 늘 구역질이 나지

선량한 응원들은 아랫도리가 저리도록 고통스러워

그대의 인생이 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평화와 기쁨의 물결은 그냥 좆같은 거야


산타클로스께서 내 다리를 잡아끄는 것 같아

우리가 크리스마스라 부르는 것은 사실 가엾기 짝이 없는 흑사병이야

연말 연시엔 보통 때보다 죽어버릴 이유가 훨씬 많지

크리스마스 시즌엔 죽어버릴 이유가 이렇게나, 이렇게나 많다고!




christmas sucks / tom waits & peter murphy

translated by lonegun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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