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슬로우 비디오

2014.10.05 14:26

잔인한오후 조회 수:2044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영화관에서 로맨스나 멜로물을 보지 않는데,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싶네요. 소재로 감정을 다루는데 친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큰 화면으로 정적인 영상을 봐야할 이유도 잘 모르겠거든요. 영상미가 매우 뛰어나다면 또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연애(?)물은 그런데에 관심 두지 않고 사람의 표정이나 행동, 각각의 관계나 목소리 등을 중요하게 다룬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건 컴퓨터로 봐도 잘 보이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SF가 아니었다면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겠네요.) 연애를 하게 되면 좀 달라질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제보자]와 [슬로우 비디오] 둘 중 뭘 볼까 고민하다가 먼저 하는 영화로 결정했는데 엄청 후회되더군요.


강풀의 [마녀]라는 웹툰에서 스토커를 주인공 삼아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어떻게 보면 (온정적인 눈길로 바라보는) 스토커를 주인공 삼고 있어 처음에 매우 꺼름직했습니다. 아마 그 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거겠죠. CCTV라는 소재 자체에 환상성을 뒤집어 씌워 로맨틱하게 만드려 했으나 저한테는 하나도 안 먹히는거거든요 그런거. 게다가 사회의 공익적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이뤄지고 있는 사생활 침해의 영역을 사적인 이유로 끊임없이 활용하는걸 보면서 어떻게 그 간극을 애정이라는 것으로 메꿀 수 있겠습니까. 아, 저런 자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앉는다면 소름이 돋겠구나 싶죠. 아무리 해체된 개인들의 연대활동이란 선으로 꾸며보려 해도 하도 그 반대의 민낯을 살면서 많이 봐오기 때문에 납득이 되질 않았어요.


특히 로맨스물의 경우에,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장르적으로 허용하고 넘어갈 때가 많기 잘 안 봐요. 감정의 도약이 자주 그러한데, 이 사람은 정말 저 사람을 이런 상황에서 좋아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언제나 남죠. 서로가 조금씩 손을 내미는 것을 영화이기에 편집하여 과정을 함축한다 하더라도, 개중에 중요한 장면 장면들로 이어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갈 때가 많아요. 그나마 여기서는 과거 친구였다는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민폐 가운데서도 애정이 싹트는 이유에 대한 약간의 논리는 얻었습니다만, 그래도 현실성을 얻기에는 무리였죠. 뛸 수 없기에 안경을 쓰고(?), 안경을 썼기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으며, 학교를 나가지 않으며 TV만 보다가, 갑자기 히키코모리로 건너뛰기도 하죠. 현재의 설정에 도달하기 위해 과정을 끌어 맞춘 기분이었습니다.


로맨스에서 나타나는, 일들이 전부 아귀가 잘 맞고 사람들이 다들 마음이 좋아서 좋은게 좋은거란 식으로 행복한 결말로 수렴해가는 상황에서, 환상성이 현실감을 떨어트린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유로서 두 가지 갈등을 일부러 넣은 기분이었어요. 부채 문제와 납치범 사건 말이죠. 어느 쪽이건 소모되기만 했을 뿐, 그 문제가 정말로 그렇게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으로 주인공들이 무슨 성장을 하거나 변화를 이끌어냈는가 하면 별로 아니란 말이죠. 쌩뚱맞게 1년 동안 안 보다 찾아와 눈이 먼걸 안다던가, 집을 헤집는 조폭들을 본 후에 호감있는 여성을 그냥 놔두고 멀뚱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죠.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납득이 가는 부분은 눈이 멀기 이전에 마을을 이해하고 싶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한테 안 맞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투덜거린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군요. 그렇다고 로맨스라고 영화관에서 봐서 투덜거리지만도 않았던게 생각해보면 엉뚱한 설정의 [과속 스캔들]도 잘만 봤거든요. 주인공의 특정 재능을 영화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단 생각에 더 심하게 투정을 부리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것을 느리게 볼 수 있는 능력으로 하는 것이 고작 던지는 숫가락에 쓰인 숫자를 읽거나, 떨어지는 낙엽을 줍는데만 활용했으니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마도 재능이라 생각할 수 있는게 역설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다는 파격을 넣으려 했을 수도 있나본데, 솔직히 뛰는게 힘든 지병만 있었으면 뭘 느리게 바라볼 수 있던가 말던가 상관 없이 영화가 굴러갈 수도 있었을거 같아요. (도무지 검은 안경을 쓰는게 동체시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걸로 함의하려는 바는 이해하겠지만 일단 소재가 주어졌다면 로맨스라서 화끈하게는 활용하지 못할지언정 미적지근하게라도 주 서사의 주요점으로는 배치를 해 주셔야죠.


인물의 설정을 장난스럽게 서술할 수도 있고, 각각의 관계가 예상외로 매끄럽게 흘러갈 수도 있으며, 반사회적인 사람에게 평균 이상의 친절을 배풀 수도 있는거고, 결국에 연애를 시작할 수도 (이 결말로 사랑이 이뤄지는.. 이라고 하기엔 오버인 것 같아서요) 있는 걸 제가 너무 까탈스럽게 생각하는 걸까요. 제겐 뭔가 엉망이었어요. 길게 이야기했지만, 취향에 안 맞았다 하는게 맞겠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06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06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368
44 [내용있음] 도희야, 감독과의 대담 [6] 잔인한오후 2014.07.21 2065
43 [내용있음] 언더 더 스킨 (소설) [2] 잔인한오후 2014.07.23 1099
42 [내용있음] 드래곤 길들이기 2 [4] 잔인한오후 2014.07.26 1974
41 수정양도 아이스버켓 챌린지 했네요 [3] 쥬디 2014.08.25 1686
40 일이 손에 안잡히네요. chobo 2014.09.02 1134
39 (추석연휴만을 기다리며) 디아블로3 이야기. 우리 큐브가 달라졌어요. 얄미운 악사. [1] chobo 2014.09.04 995
38 [내용있음] 루시 [10] 잔인한오후 2014.09.13 1896
» [내용있음] 슬로우 비디오 [4] 잔인한오후 2014.10.05 2044
36 [바낭] 오랜만의 아이돌 잡담... 입니다 [13] 로이배티 2014.10.12 3441
35 노다메 좋아하시는 분들 [내일도 칸타빌레] 보셨나요? [17] 쥬디 2014.10.15 4036
34 미생 특별 5부작이 시작된 거 알고 계세요? [3] 쥬디 2014.10.16 3623
33 풋볼 보다가 깜짝 놀랐네요 [1] 푸네스 2014.10.20 824
32 [야구] 언더핸드에 대한 환상 [1] 흐흐흐 2014.10.24 1199
31 (기사링크) 박주영 골, 상대 수비수 2명 가볍게 제쳐…"벼락 슈팅 성공" [6] chobo 2014.11.25 1514
30 (축구이야기) 아시안컵 대표진 발표. 박주영 제외. chobo 2014.12.22 0
29 영화 '국제시장' 관람한 문재인 의원 [10] 왜냐하면 2014.12.31 3402
28 온종일 고양이와 지내본 한 달/자랑하고 싶은 어떤 친분/ 유진박의 연주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나요?/도무지 운동이 하기 싫을 땐 [24] Koudelka 2015.02.04 3333
27 서울 이랜드 FC의 유니폼이 발표 되었는데... [11] 달빛처럼 2015.03.06 1608
26 [바낭] 네임드? 유저들에 대한 간단한 생각 [48] 異人 2015.06.15 3201
25 그 동안 등한시 했던 '냉장고를 부탁해'를 다시 보려는 이유.. [1] 수지니야 2015.07.14 221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