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더 이상 술도 안마시고 책도 잘 읽지않지만 아래 문장은 정말 근사하네요. 해마다 '이상문학상' 수상집 나오면 사서 읽던 기억이 나요.

술 하면 이 곡이 생각나요. [조디악]에도 잠깐 나오죠.

Deacon Blues - YouTube


-----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 


  지난 2월 늦은 저녁이었다. 혼자 이 술집에 들른 것은 내 입장에서도 다소 의외였다. 나는 소주나 막걸리를 즐기지 않았고 이 집은 맥주나 와인 같은 것을 팔게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술을 시켰다.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 전에 김치와 나물들이 나왔다. 제대로 들어왔다는, 아니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느낌이었다. 밑반찬 만으로 술을 반 병 비우기에 부족함이 없없다. 그 후로 이 집은 내가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꼴로 들르는 단골 술집이 

되었다. 

  빈대떡에 막걸리, 찌개에 소주, 몇 가지 나물들과 김치를 늘어놓고 혼자 술을 마시면서 하는 생각이란,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는 식의 소소한 과거사이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든가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곳은 내게 오로지 기억, 기억, 그렇게 속삭이는 장소가 되었다. 천천히 술을 마시다 보면 홀연, 낫 놓고 기역 자를 모르듯, 기억 속의 내가 뭣도 모르고

살아온 모양이 환등처럼 떠오른다. 현실의 시간은 밤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기억의 한낮을 산다. 요즘 내가 그 땡볕 아래서 기다리는 인물은, 숨겨둔 단골 술집처럼 나는 남몰래 마음에 두고 좋아하지만, 그쪽은 이제 나를 한낱 친구로만 

여기고 잊었을 한 여자이다. 기억이란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는 방식이며 포즈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배운다. ……」 

권여선, 『사랑을 믿다』 中 

스스로를 술의 작가라고 칭하는 권여선 님의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사랑을 믿다》 도입부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의 한국 문학 중 손꼽히게 아름다운 도입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글은 여기서 가져왔어요.

주류 문학 : MLBPARK (donga.com)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914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83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8028
126515 (스포일러 가득) 프로메테우스: 비xx의 정체부터 마이클 파스빈더의 xxx까지 물어보는 작가 인터뷰. 그외 최근 밝혀진 떡밥 및 Q&A 총정리. [7] mithrandir 2012.06.15 21905
126514 마크 트웨인의 자위에 관한 연설. [14] philtrum 2010.09.08 21898
126513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보면 장자연 생각이 나요. [4] 옥수수가 모르잖아 2011.12.02 21814
126512 저희집 앞에는 이상한 안마방이 있어요. [15] 바스터블 2015.08.04 21752
126511 성인 38.5도이면 심각한건가요? [4] 점선면 2014.02.03 21661
126510 [듀나인] 좋은 그림책/동화책 소개 부탁드려요. [27] underground 2015.10.26 21557
126509 전북대 공대개 오월이(스압) [26] 탐스파인 2013.05.30 21500
126508 [연애상담] 마음이 지친 남자가 여자에게 되돌아 가기도 하나요? [89] grè 2013.06.20 21468
126507 30대 중반 남자의 적정 보유 자산 [20] 휴지통 2011.03.01 21414
126506 실온에서 하루 지난 삼각김밥 먹어도 되나요? [20] disorder 2010.10.24 21380
126505 인간 남자랑 여자는 정말 물리적으로 다른 존재 같아요. [43] 침엽수 2012.09.21 21331
126504 [공지] 배너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공지드립니다. (배너 위치 관련) [54] 폴라포 2012.11.20 21203
126503 가수 하늘 사망 [13] 메피스토 2013.10.08 21087
126502 [혐오주의] 치석제거/귀지제거 영상 [17] 자본주의의돼지 2013.05.22 20910
126501 [잡담] 귀여운 여친 & 투정 받아주는 착한 오빠가 정말 일반적인 구도인가요? [49] 지금만익명 2014.02.25 20781
126500 배에 붉은 반점이 번져요;; [7] sunday 2011.07.01 20689
126499 제가 느낀 나라별 게이들의 특징 [13] 이름없엉 2010.11.11 20671
126498 당분간 게시판이 좀 덜컹거릴 겁니다. [5] 룽게 2014.01.23 20555
126497 자기 전에 하는 일 + 영시추천 [3] 미루나무 2011.03.10 20475
126496 잊어버린 한글파일 비밀번호를 복구할 방법이 있을까요? [8] 일희일비 2017.06.19 2037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