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9 15:15
인비저블 맨 The Invisible Man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2020. ☆☆☆★★
A Universal Pictures Presents Blumhouse Productions/Goalpoast Pictures/Nervous Tick Productions Co-Production, distributed by Universal Pictures. Arri Alexa, Dolbly Atmos. 화면비 2.39:1, 2시간 4분.
Director & Screenplay: Leigh Whannell
Based on a novel by H. G. Wells, ”The Invisible Man”
Cinematography: Stefan Duscio
Production Design: Alex Holmes
Art Direction/Set Decoration: Alice Lanagan, Katie Sharrock
Special Makeup Effects: Sean Genders
Music: Benjamin Wallfish
Editor: Andy Canny
Stunt/Fight Coordinator: Harry Dakanalis, Stephen Murdoch, Yasushi Asaya, Chris Weir
Special & Visual Effects: Dan Oliver, Cutting Edge, Future Associate, Fin Design
CAST: Elisabeth Moss (세실리아), Harriet Dyer (에밀리), Aldis Hodge (제임스 레이니어), Storm Reid (시드니 레이니어), Michael Dorman (톰 그리핀), Oliver Jackson-Cohen (에드리언 그리핀), Renee Lim (닥터 리), Benedict Hardie (마크- 건축회사 사장), Nick Kici (테일러- 식당 웨이터).
유니버설에서 우리 스튜디오가 콘트롤하는 캐릭터들이 이리 많은데 좀 활용해서 마블과 디즈니가 해놓은 것 같은 세계관을 건설할 수 없나 라는 뜬구름 잡는 생각을 가지고 실현화를 위해 획책을 한 결과, 톰 크루즈 주연의 [미이라] 를 내놓았고, 그 안에서 “미이라” 괴물을 비롯하여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등장시켰었으나, 1억2천만불이라는 막대한 제작비에 비해 미국 국내에서 8천만불을 겨우 넘는 성적을 거두고 비평적으로도 폭망하는 바람에 (단,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통털어서 계산하면 4억불을 조금 넘는 성적을 거둬들여서 아마도 제작비 회수는 충분히 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여담인데, 박스 오피스 모조에 의하면 세계에서 중국을 제외하면 한국이 이 한편의 관람에 가장 많이 돈을 쓴 나라더라. 일본의 두 배가 넘는다. 이러니 미국 스튜디오들이 한국에 융숭한 대접을 안 할수가 없을 것 같다) “다크 유니버스” 라는 (솔까 촌티가 무럭무럭 나는) 확장우주 컨셉은 파일럿 단계에서 사그라지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투명인간] 의 기획은 여전히 살아있었나 보다. 그리고 애초부터 그렇게 할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미이라] 의 폭망때문에 궤도수정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예산 (이 한편의 제작비는 7백만불이라는 것이 정식 발표인 모양인데 [미이라] 의 20분의 1 정도의 규모다) 호러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굳히고, [쏘우] 시리즈와 [업데이트] 의 각본-감독인 리 워넬에게 전권을 일임했다.
그런 결과 워넬이 만들어낸 한편은 내가 적극 지지하는 훌륭한 저예산 펄프SF영화 [업데이트] 와 비슷한, 마블영화로 대표되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스타일과 미적감각, 그리고 아젠다에 익숙한 분들의 의표를 찌르는 결과물이 되었다. 확실히 블룸하우스 계열의 잘 빠져나온 (각본의 경우는 반드시 세련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일련의 호러 영화들,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얼기설기 뜯어맞춰 만든 것 같은 제품들 말고, [인시디어스] 시리즈라던가 [위지: 저주의 시작] 을 포함한 마이크 플래너건의 초기작들과 흔히 참칭되는 “세계관” 이 아닌, 일종의 미적 감각의 “우주” 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도 강하게 든다. 그러나 워넬이 스스로의 아마도 사사로운 SF 팬으로서의 감성을 거리낌없이 도입했던 [업데이트] 와는 달리 [인비저블 맨] 은 이것 역시 헐리웃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개스라이팅” (이 단어 자체가 고전 미국 영화의 제목에서 유래된 것임을 상기하시라) 에 의해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혼자서 고군분투해야하는 여성 주인공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리 워넬은 이 한편을 현대적 호러 영화로써 작금의 (미국) 관객들이 제대로 반응할 수 있는 활동사진으로 만드려고 고심하는 과정에서, 투명인간이 아닌 투명인간의 피해자— 즉 “보이지 않는 존재” 에 대해 끊임없이 호소하고, 편집증적으로 두려워하는 캐릭터— 를 주인공으로 아예 삼아버리는 것이 공포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렇게 일단 방향을 틀면, 당연한 얘기지만 현금의 관객들의 공감을 폭넓게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 즉 피해자 주인공을 일상 생활에서 흔히 당하는 종류의 “무시” 와 “의심” 의 시련을 겪게 되는 여성으로 만드는 옵션을 취했을 것이 예상되는 것이다. 한국 영화를 놓고 비교하자면 이권 감독의 [도어 락] 이 이러한 전략을 면밀하게 가동시켜서, 단순히 싸이코 스토커가 젊은 프로페셔널 여성을 괴롭히는 모습을 남성 중심의 시점에서 응시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 영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사회 경제적 처지에 있는 여성 관객들의 절대적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리 워넬이 평소에 페미니스트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는 예술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난 사실 잘 모른다. 원래 그런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긴 하지만. 인터뷰 하나 둘 읽어가지고 서뿔리 판단하지 말기 바란다), 단순히 여성을 최소한 반수로 계산한 보다 많은 수의 관객들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지를 고르다 보니까 지금 보는 바와 같은 작품이 나왔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추측되는 것은 아마도 각본이 수정을 거치는 단계에서, 그러니까 실제로 프리 프로덕션이 진행되는 단계보다 앞서서 워넬은 이 여주인공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주도면밀하게 고려를 했을 것이며, 이미 엘리자베스 모스를 물망에 떠올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모스는 [웨스트 윙] 이나 [Mad Men] 등의 초유명작 TV 시리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등장했었고, 연기력에 관해서는 이미 검증이 끝난 상태였지만, 가장 최근에 인상이 남는 조연이었던 [어스] 의 백인 이웃의 어머니처럼 오히려 신경이 너무 두꺼워서 말썽인 캐릭터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연기자였다. 그러나 이 한편에 있어서는 줄리아 로버츠가 [적과의 동침] 에서 과시한 것 같은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카리스마에 바탕을 둔 “스타로서의 공감” 과는 전혀 다른, 어떤 면에서는 “믿을 수 없는 화자” 의 영역으로 발을 담글 수도 있는 정서적 불안정성과 고집이나 독선으로 비쳐질 수 있는 확신의 표현 등에서 공감과 의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그런 위험하면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상 모스를 캐스팅한 시점에서 이 한편의 주된 장치의 60% 이상이 구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워넬 감독의 극단적인 와이드스크린 (화면비가 2.39:1 이다) 구도와 세심한 원테이크 샷의 안배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빈 공간에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는 연출의 스킬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칭찬할 것도 없지만, 의외로 나의 예상을 뒤엎었던 점은 [업그레이드] 에서 의식적으로 아날로그적 투박함과 디지털적 매끈함을 대비시켰던 것과 비슷하게, “투명인간” 의 투명성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물론 투명인간의 수트의 작동 방식은 최첨단의 CGI 에 의해 구현되어 있지만, 그 밖의 액션은 거의 모든 “특수효과” 가 배제된 연기자들의 스턴트 연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솔직히 놀라왔다. 이 점 역시 투명화의 단계에 의해 체내의 내장이나 혈관이 드러나보이는 따위의 “신기한 볼거리” 에 특수효과 비용을 소비했던 [홀로우 맨] 같은 현대의 작품들과 극명히 대비된다 (이 한편과 비슷한 투명성의 표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보여준 한편이라면 존 카펜터 감독의 1992년작 [투명인간의 회고록] 이 그나마 근접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특히 정신병원에 수용된 세실리아를 투명인간이 습격하는 장면에서의 원 테이크로 길게 빠지면서 등장인물들이 “혼자서” 이리 터지고 저리 으깨지는 액션 시퀜스는 [올드 보이] 의 장도리 액션 시퀜스처럼 엄청나게 단순한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충격적으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마디로 말해서 워넬 감독의 연출은 주도면밀하다. 초반부에 세실리아가 베이컨을 요리하다가 부엌에 불이 날 뻔하는 시퀜스에서는 그 롱테이크의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때문에, 첫번째 관람할 때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부엌 스토브의 불의 강도가 세게 변하는 순간을 놓쳐버렸고, 두번째 감상할 때에 겨우 그 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편화된 편집 기법을 통해서 관객들의 집중을 흐트려놓거나, 매직에서 쓰는 트릭처럼 오주의 (誤注意 misdirection) 를 통해 그들을 왁 하고 놀래키려는 연출 방식은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인비저블 맨]은 호러/SF 영화의 팬들에게—고전 영화에 능통하면 할 수록 더 큰— 포만감을 안겨다주는 건실하고 교활하게 잘 만든 한 편이다. 그 페미니즘적인 시각은 페미니즘적인 이념을 어거지로 주입한 데서 나오는 게 아니고 위에서 설명했듯이 현대적으로 투명인간이란 제재의 호러영화로서의 파워를 극대화시키고자하는 기획을 한 지극히 머리가 좋고 고전 장르 영화에 빠삭한 필름메이커가 합리적이고 명민하게 우려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