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0 11:33
아이다 루피노는 클래식 할리우드 시절에 만만치 않은 감독 경력을 쌓은 유일한
여성배우입니다.1940년대 중반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감독을 대신해 영화를 마무리
지은 뒤로, 남편과 함께 세운 회사에서 다섯 편의 B 영화들을 감독했고, 그 뒤로는 수십
편의 텔레비전 에피소드를 만들었지요.
루피노의 작품들은 주로 성폭행, 중혼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다룬 여성주도의 영화인데,
이들 중 [히치하이커]는 예외적인 작품입니다. 여자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필름 느와르죠.
여성 감독이 만든 할리우드 최초의 필름 느와르라고 합니다. (세계 최초는 에디트 칼마가
1949년에 감독한 노르웨이 영화 [Døden er et kjærtegn]이래요. 필름 느와르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엄격하게 정의될 수 있는 장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작품입니다. 1951년에 가스실에 들어간 빌 쿡이라는 살인자가
모델이죠. 일종의 공익광고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런 주의없이 히치하이커를 태우면
빌 쿡을 태웠던 운전사들처럼 끔찍한 시체가 되어 길가에 버려질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이 내용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글이 영화 오프닝에 깔리기도 합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중년 남자가 멕시코 국경 근처로 낚시 여행을 떠나요. 중간에 계획을
바꾸어 멕시코로 들어가던 그들은 우연히 히치하이커 한 명을 태우는데, 아뿔싸. 그는
연쇄살인마 에멧 마이어스가 아니겠습니까. 마이어스는 그들을 권총으로 위협하며 산타
로살리아까지 운전하라고 명령하고, 남자들은 그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수가 별로 없는 영화입니다. 마이어스는 차 뒤에서 명령하고, 남자들은 복종하죠.
종종 남자들은 그에게 저항하기도 하지만, 이런 영화에서는 총 가진 남자가 언제나
우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총을 가지고 있어 더 세기도 하지만 총을 놓치는 순간 이야기가 끝나 버리기
때문이죠. 다행히도 70분밖에 안되는 짧은 영화이기 때문에 길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설정 때문에 영화는 이런 식의 액션 영화가 당연시하는 마초주의를
놀려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남자들에게 힘을 주고 상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 자신의 용기나 힘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이죠. 그 때문에 영화 끝에서
마이어스가 총을 놓치는 순간 역전되는 상황은 통쾌하다기보다는 쩨쩨해보입니다.
극저예산이고, 또 그걸 노린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 대부분을 차 한 대와 총 한 자루,
세 남자로 끌어가는 작품이죠. 이 경제성은 울머의 [우회로]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이런 식으로 끌어가는 영화들이 이들 두 편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겠죠. 다행히도
루피노는 영화 내내 쓸데 없는 잔가지를 날려버린 타이트한 연출로 단단한 서스펜스를
유지하고 있고, 세 배우들, 특히 살인마 마이어스를 연기한 윌리엄 톨먼은 근사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쓸데 없는 자기도취로 이야기를 망치지 않는 완벽한
필름 느와르 악당이지요.
(12/05/10)
★★★
기타등등
영화 개봉 직후 일어났던 일. 윌리엄 톨먼이 컨버터블을 타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빨간 불을
만나 정지했는데, 컨버터블을 탄 옆의 운전사가 "댁이 히치하이커요?"라고 묻더랍니다.
톨먼이 그렇다고 했더니, 그 운전사는 차에서 걸어나와 그의 따귀를 후려갈기고 자기
차에 돌아가더래요. 그 뒤로 톨먼은 이 사건을 거의 아카데미 수상에 맞먹는 경험으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했답니다.
감독: Ida Lupino, 출연: Edmond O'Brien, Frank Lovejoy, William Talman, José Torvay, Sam Hayes, Wendell Niles, Jean Del Val, Clark Howat, Natividad Vacío
IMDb http://www.imdb.com/title/tt0045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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