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8 15:32
누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어도, 알아서 보고하는 제 근황입니다 ^^.
연말까지만 근무하는 것으로 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발적 퇴사라서 마지막까지 최소한의 품위유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은 이미 심란하고 춥네요... 약 1년반 전에 한 번 퇴사를 결심하고 사직서를 낸 상태에서, 회사측의 강력한 만류와 주변의 조언을 듣고 무수한 고민 끝에 번복했던 적이 있었죠. 그 번복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번복이 저를 더 열심으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요. 그리고 나중에 또 언제가 됐든 그 시기를 내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거라는 생각으로 달려왔던 것 같아요. 사실 퇴사 후 특별한 계획이 있다거나, 건강이 악화 되었거나 (썩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쉬고 싶어요, 그냥 그래요. 지금 이렇게나마 엎어지지 않으면, 여기서 어영부영 주저앉다가 이대로 화석이 되거나 언젠가 타의에 의해 밀려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나서부터 정신 바짝차리고 퇴사를 결심했더랬습니다.
십몇 년을 해도 직장생활엔 왕도가 없고, 완벽하고 좋은 직장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직장이란 건 몸 담는 햇수가 늘어갈수록 환멸만 고이는 곳이라... 거기에 비해 조직에서 요구하는 기대치와 그 기대치에 부응함에 대한 보상은 반비례하는... 뭐 흔한 얘기죠. 대단치 않은 학벌에 외모에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배경이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차별 받거나 배제당할 만큼 주눅 들어본 적도 없고, 남들과 쉽게 적을 만들게끔 나대고 살지는 않으며 내 존엄성은 내가 지키고 그러기 위해선 부단히 성실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름있는 그 무엇이 되지 못해도 어떤 대단한 조직에 몸 담지 않아도,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며 약간의 부지런함을 더 떨면서 근근히 살아온 게, 결국은 순진한 패착인가요? 남들 다 가고 싶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대해 부러움이나 열등감을 가져본 적 없고 나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믿었던 것은 그저 내 착각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쓰디쓴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겠죠.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을 그렇게 혐오했던 것은, 이미 제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재능도 배경도 처세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감한 탓이었을지도요.
퇴사 예정인 이 조직은 한 마디로 '자수성가의 (가장) 나쁜 예', 라고 해두죠. 언젠가 제가 간접적인 관련글을 써서 여러분들에게 비난을 들어본 적도 있지만, 대한민국 중소기업의 온갖 나쁜 폐해를 종합선물세트로 직원들에게 다 안겨주는(아는 분들은 느낌 다 아시리라). 그런 회사의 대표에게 그동안 신임과 총애를 받아 일해 오면서도, 직원들과 위화감을 갖지 않기 위해 제가 감수했던 겸손한 노력들이나 매출과 성과를 위해 물밑으로 피가 나도록 해왔던 물갈퀴질을 생각하면 지금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탈한 것도 있지만, 결국 조직의 향방과 분위기를 지배하는 오너의 마인드라는 게 너무 무식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점에 질식할 정도로 질려버렸습니다.
더욱이 2세 경영이라는 말도 무색하리 만큼 자식들과 친인척으로 그 체제를 견고히 하는 과정에서의 야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지요. 회사가 저에게 칼날을 겨눈 적도 없고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았다고 하여 안심하거나 방심할 수도 없고, 더 무서운 건 이곳에 이렇게 주저앉아 최후의 몇 인으로 남게 되는 결말이었습니다. 이 고비를 한 번 더 넘기면 이제 진짜로 여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조직에서도 늘 개별자로 남으려는 제 끈질긴 고집과 곤조가 결국 이번에도 이기는 것을 보게 되네요. 날씨는 춥고 새해는 밝아오는데 백수가 되려는 이 결심이 과연 온당할까 싶었지만, 이대로 화석이 될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런데 그 박제됨을 기꺼이 허용할 근거를 아무 것도 제시해 주지 않는 이 조직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변을 늘어놓아 보지만, 결국 철없는 소리에 불과하겠죠. 나사는 또 바꿔 끼워 질 뿐 돌아가는데 지장은 없을 테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잡코리아를 뒤지며 그나마 더 먹은 나이에 어딘가로 바늘구멍 같은 중장년 취업자리를 또 알아볼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던지지 말아야 할 회사의 조건은 하나 더 늘었군요, 가족회사여서는 안 될 것.
그런데 대한민국에 그렇지 않은 회사가 과연 있기는 하다는 말입니까? 또는 모든 가족회사가 다 이렇다는 말입니까?
2014.12.08 16:07
2014.12.08 16:29
어디든 정말 아주 맘 편하게 그만둘 수 있는 직장이 흔하겠나요? 그래도 섭섭보다는 시원이 더 커요.
2014.12.08 16:54
공기는 차갑고 눈은 쌓이는, 조금만 콜록거려도 지난여름보다 훨씬 마음이 약해지는 그런 겨울에
퇴사를 결정하실 만큼 단단한 정신의 소유자이신 거죠.
용감하십니다. 그 용감으로 어디든 뭐든 누구든 다시 사귈 수 있을 거예요.
진심으로 행운을 빕니다. 게다가 느긋한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순간의 기쁨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2014.12.08 21:25
(저에게는) 늘 이성적이고 냉철한 댓글만 달아주셨던 것 같은 은생님이 이렇게 이런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 걸 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조직에서 제가 맘고생 몸고생한 세월이 헛되지만은 않았던 것 같네요. 단단한 정신까지는 아니지만 결단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영원히 노예가 된다는 막연한 생각이 저를 이끄는 것 같아요, 좁게는 제 회사생활을 크게는 제 인생을.
2014.12.08 20:57
저도 10여 년의 직장생활을 접고 자영업(이라 쓰고 감옥이라 읽는다) 시작한 지 몇 년 됐는데요, 돌아보면 마지막 직장을 관두고 내 일을 준비하는 그 동안이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달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계획없이 관두는 건 참 막막하기도 했지만 막상 닥치니 어떻게든 살아지더군요. 내 밥 안 굶고 고양이 사료 살 정도면 뭘 한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또 좋은 날이 올테고요.
2014.12.08 21:29
아직 남은 카드 할부금, 기타등등의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이 있지만 이번에도 눈을 질끈 감습니다. 길을 찾기 위해 길을 잃는 거지요. 그리고 내 밥은 가끔 굶어도(쇼핑은 끊어도 라고 읽지요 ㅜ) 우리 고양이 사료와 모래 살 정도면 뭔들 못하겠어요, 500배 빙고!!! 이 와중에도 자기 안 보고 컴질한다고 방해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표정을 하고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저 놈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합니다.
2014.12.08 21:05
쿠델카님 드디어 소설 쓸 기회가 생긴 겁니다. 이참에 작품 하나 도전해 보세요. 글 쓰셔야 할 분이 중간 관리직이라....
2014.12.08 21:31
어머나, 저에게 아직도 소설을 쓰라고 하는 분이 계시다니 저 진짜 눈물날 뻔 했어요. 이 회사 다니면서 책 한권도 읽고 살지 못했죠. 일상이 너무 소설같고 소설이 너무 같잖을 만큼 사는 게 치열해서요. 몸으로 소설을 살았달까요. 이제 막 당분간이라도 아무렇게나 먹고 자고 뒹굴고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이 회사의 때를 벗어버릴 거라고요!!!
2014.12.08 21:56
2014.12.08 22:28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밝힌 적은 한번도 없으신데 워낙 필력이 좋으셔서 제가 기대하고 있답니다. 쿠델카님 회사에서 겪은일만 써도 장편 소설이겠네요.
2014.12.08 23:13
아이고 챙피해라;;; 소설가지망생은 근 20년 전 얘기 같고요, 그 세계 떠난 지가 너무 오래 되었고 소시민적 생활인으로 살아온 시절이 너무 길어서요. 어차피 등단도 못했지만 제가 소설을 쓴다해도 별로 인기가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요즘 유행하는 화법에 한참 거리가 멀어서요. 지루하고 장황한 만연체의 폐해겠지요만... 한 때 미치도록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는데 그건 내 변별성을 갖고 싶었던 같잖은 허영이 극에 달한 때의 긴 열병이었고요. 지금은 되고 싶은 게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이게 함정인지 우물인지는 더 지나봐야 알까요? 어쨌든 과찬들은 너무 감사하고 부끄럽네요.
2014.12.08 23:35
소시민적 생활인으로 살아온 그 시절이 쿠델카 님의 글쓰기를 위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전 사실 예전에는 쿠델카 님의 글이 지루하고 장황해서 못 읽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읽으면 읽을수록 묘한 매력이 있는 문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요즘 유행하는 화법으로 말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리고 어떤 것들은 마음에서 떠나보냈을 때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어쨌거나 지금은 쉬기로 하셨으니 그동안 읽지 못한 책도 읽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일 하시면서 푹 쉬시길 바랍니다.
2014.12.09 00:05
제가요, 그렇게 갖고 싶어 몸 달을 때는 손에 안 잡히더니 이제 아무 감흥도 없는데 얼쩡대는 애인에는 무섭도록 무감하여서요. 그리고 소설가가 된다고 해도(어차피 될 것 같지도 않지만) 이제는 제 삶이 하나도 근사할 것 같지도 않아요. 그래서 한때 열렬히 질투하던 몇몇 작가들을 봐도 그냥 옆자리 앉은 동료 보듯이 심드렁하고 지루해요. 저에겐 지금, 무엇보다 잘 살아내야 할 현실이 너무 중요해서요. 무엇보다 책이 너무 흔한 시대, 아무나 약간의 다른 맘만 먹으면 책을 출판할 수 있는 시대에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라고 쓰고 나니 아직도 저는 그쪽에 미련이 있는 지 어쩐지 잘 모르겠지만, 어쩄든 과찬은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2014.12.08 23:04
2014.12.08 23:16
네, 누구나 그러하듯 퇴사 결정은 쉽지 않았지요. 당분간이라도 여유있는 삶이 될 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다리가 붓도록 갤러리에서 그림을 보고 대낮에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발레를 보고 뭐 그렇게 살아보고는 싶습니다. 저보다 더한 마음고생 하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엄살 같아 저어되지만, 쉽지는 않은 세월이었던 것 같네요. 격려 감사합니다.
2014.12.09 05:23
마음이 서늘해지는 글이군요(좋은 의미로요). 전 조직 생활 오래 못 견디고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데 회사 밖이 지옥인 건 사실이더군요. 다들 힘겨워서 나오지만 또 차악의 지옥으로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으니 대안이 없기도 하고요. 오래 개인적으로 살아온 사람은 또 조직에서 뽑질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급여에도 천둥벌거숭이로 살고 있습니다만, 어디에서도 자기답게 밥벌이를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면 너무 클리셰같지만, 쿠델카님도 휴식 시간 후 보다 나은 직장과 연이 닿으시길 바랍니다.
2014.12.09 13:40
구구절절 다 맞는 말씀이시구요, 크게 다르지 않은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지 잘 알기에 지금 이 선택을 좀 더 유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요. 그렇지만 다시 반복되는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면 거기 또 다른 지옥을 새로 알아가는 설렘이라고 되찾아보고자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밥벌이 자체가 나를 내려놓는 거라는 전제는 변함없겠지만요. 감사합니다.
2014.12.09 09:09
저도 그런 회사를 뛰쳐 나왔는데, 아직까지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근근히 그 회사 소식을 듣기는하는데.. 이제 나이들고 짬밥 먹다 보니 회사가 점점 죽어 간다는 느낌이 뭔지 알겠더군요..
잘 나왔다고 자평하고,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뭐,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알겠습니까마는, 그런거 걱정하면 죽을 때 까지 답 안나오는지라 과감히 스킵!
2014.12.09 13:44
지금 제가 다니는 곳응 부동산에 현금에 돈이 많아 망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나마 회사가 기울지 않고 아직 전성기일 때 그만 두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업계에선 점차 쇠락해 가겠죠(오너가 원하는 게 이 계통에서 벌만큼 바짝 더 벌고 업종전환 할 계획이라). 현재로써는 퇴사 후 당분간 회사 소식을 듣지 않고 싶다는 마음 뿐입니다만. 인생이 대단히 바뀌지는 않더라도 지금은 한 템포 멈출 때!
2014.12.09 09:17
사진을 찍으셔야지요! 이름이 엄연히 있는데! :-)
몸이 기억하는 기상 시간이 있습니다. 쏘세지 빵 같이 이불 둘둘 말고 그 시간에 잠이 살짝 깨서는 아참, 안가도 되지, 하는 맛 즐기시길.
2014.12.09 13:57
첨엔 무슨 말씀이신가 했어요. 제 닉네임이군요. 쿠델카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 많았는데, 그만 두면 정말 밤이고 낮이고
온수매트와 한몸이 되고 말 겁니다.
2014.12.09 11:54
안녕하세요! 쿠델카님, 반가운 근황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날들만 가득 하시길 기원해드릴게요~ 몸도 마음도 빠르게 회복하실 수 있도록! 아차, 쿠델카님, 궁금한 사항이 있어 쪽지를 보내드렸답니다. 확인해주시면 감사드릴께요~
2014.12.09 13:59
어이쿠, 확인은 했습니다만... 제게 너무 어려운 숙제를 주시네요 ㅜ. 지금 바로 답해야 하는 긴급 사안이 아니면 좀 생각을 해보고 정리해서 답을 드려야겠죠. 그렇지만 제가 과연 그럴 주제가 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네요... 암튼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2014.12.09 16:55
날이 추운데.. 잘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도 2년전쯤에 비슷한 생각과 판단으로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새출발 했었는데.. 득과 실이 반반인듯 싶어요. 뭐, 새로운 경험과 고통(?)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살아는 있으니까.. 결국 득이 더 큰걸지도 모르겠네요.
2014.12.09 18:23
에고고, 실력이 없어서 좋은 회사 못 다니는 제 탓이죠. 그래도 분명 다른 길은 또 있으려니 해서요. 결국 비슷한 지옥이라도요.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