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21 21:09
언젠가 "왜 요새는 [다이 하드] 아류작들이 안 나오지? 재치 부리지 말고 그 공식에 충실하기만
해도 재미있지 않을까?"라고 웅얼거렸던 적 있습니다. 아마 [다이 하드] 5편을 보고 나서
그랬던 거 같아요. 요새 [다이 하드] 영화들은 점점 1편의 뿌리에서 멀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전 앙트완 후쿠아의 [백악관 최후의 날]에 고마워했어야 합니다. 이 영화야 말로
[다이 하드] 1편의 충실한 후계자였으니까요. 테러리스트들이 장악한 밀폐된 공간에 갇힌
우리의 영웅이 그들을 일망타진한다는 이야기. 정말 이런 영화는 오래간만에 봤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영화는 제가 기대했던 재미는 주지 못했습니다. 재미가 없었다는 말은 안 하겠어요.
하지만 그 재미는 제가 기대했던 재미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영화에 대한 호의적인 리뷰로
연결되지도 않습니다.
위에서 벌써 반은 말해놨지만, 그래도 줄거리를 요약해보죠. 마이크 배닝이라는 백악관 경호원 출신
경찰이 주인공입니다. 왜 그가 백악관을 떠났는지 보여주는 프롤로그가 끝나면 영화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남북한의 긴장관계가 극에 달한 어느 날 한국 총리가 백악관에 방문하는데, 알고 봤더니
총리의 경호팀이 몽땅 북한 테러리스트 무리였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순식간에 백악관을 장악하고
대통령을 인질로 잡습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어쩌다가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백악관으로 들어간 배닝 뿐이죠.
주제 때문에 한반도 사람들은 이 영화를 조금 다른 식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남한과 북한 사람들의
반응은 또 조금씩 다를 거예요. 하지만 이 반응은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습니다.
[백악관 최후의 날]은 의도와는 상관 없이 웃기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더 웃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위험하고 이상한
나라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어떻게 위험하고 어떻게 이상한지는 전혀 몰라요. 한반도 문화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부를 안 했어요. 심지어 조금만 조사하면 끝날 이름 짓기도 엉망입니다. 북한 사람들로 나오는
배우들 중 한국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는 버전에서는 성우를
기용해 한국어 대사의 절반 정도를 다시 더빙한 모양인데, 그러니까 더 웃깁니다. 뜻도 모르면서 질러대는
엉터리 한국어와 영화 더빙 성우의 또렷한 한국어가 마구 섞여 있어요.
이래놨으니,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 지구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집합이라는 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전 북한 출신 테러리스트들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중 몇 개는 후쿠아의 영화에서 벌어진 것보다 더 끔찍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런 종류의 북한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목적으로 이런 종류의 테러를 벌이는 건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호그와트를 믿으라고 해요. 그게 더 믿기가 쉽습니다.
이 영화가 이렇게 코미디로만 소비되는 걸 막으려면 액션이 강화되어야 할 텐데, 후쿠아는 멀쩡하게
잘 할 수 있는 이 영역에서도 계속 헛발질입니다. 초반 백악관 공격 장면은 괜찮습니다. 전혀
믿음이 안 가지만 의외성과 박진감은 있죠. 하지만 주인공 마이크 배닝이 백악관에서 활약해야 할
부분에서는 모든 게 밋밋해집니다. 결정적으로 백악관이라는 공간은 배닝에게 제대로 된 액션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릭 윤이 연기하는 테러리스트 강아무개군과 만나는 장면도 별로 없고
머리 싸움을 할 구석도 없습니다. 그냥 만나는 테러리스트마다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찌르거나
목을 꺾어 죽이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단 말이죠. 심심합니다.
모건 프리먼, 아론 애크하트, 딜란 맥더못, 안젤라 바셋, 멜리사 레오... 조연들은 준수한 편입니다.
어쩌다가 이들이 모두 제라드 버틀러의 어설픈 액션의 조연으로 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버틀러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모양인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주인공이
정말로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던 걸까요.
(13/05/21)
★★
기타등등
1. 애슐리 저드를 참 오래간만에 봅니다. 나이 든 티가 나더군요. 하지만 역시 오래간만에 본
안젤라 바셋은 달라진 거 없이 거의 그대로.
2. 한국인들이 가장 웃기게 나오긴 하지만 백악관의 동조자로 나온 미국인 캐릭터도
웃긴 건 마찬가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짓을 한 건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모르겠더군요.
감독: Antoine Fuqua, 배우: Gerard Butler, Aaron Eckhart, Finley Jacobsen, Dylan McDermott, Rick Yune, Morgan Freeman, Angela Bassett, Melissa Leo, Radha Mitchell
IMDb http://www.imdb.com/title/tt2302755/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5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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