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4 14:16
사회인야구를 시작한 지도 어언 4년이 다 되어 갑니다.
보직은 투수, 좌완입니다.
제가 "사회인야구 팀에서 투수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대개 사람들은 “앗, 정말? 얼마나 빨리 던지시는데요?”라고 묻습니다.
얼마나 빨리 던지느냐.
형편없습니다.
스피드 건에게 창피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컨트롤은 좋느냐.
상대팀 타자 몸에 퍽 하고 맞는 볼이 회당 서너 개쯤 나옵니다.
상대 선수들한테 빠따로 맞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투수로 계속 기용되는 게 신기할 지경입니다.
왼손 투수가 드물어서일까요? 아니면 잘생겨서?
물론 저도 잘 던지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포수 미트에 팡팡 소리를 내며 빨려 들어가는 공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보니 구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조금이나마 볼의 빠르기를 늘려볼 요량으로
평소에도 야구공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는 게 버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감싸 쥐고 있기도 하고,
엄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살살 돌려보기도 합니다.
헌데 야구공을 만지고 있노라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요.
혹시 공인구를 만져본 적이 있으신지.
세상에는 축구공, 테니스공, 탁구공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이 있지만,
야구공만큼 부드럽고 감촉이 좋은 공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법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아직 성욕을 자극당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진 않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시합 중에 와인드업을 하다가...
참으로 난감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인구의 외피는 천연가죽, 즉 소의 가죽으로 만들어집니다.
이때 가죽은 하나하나 사람의 손으로 꿰매지요.
그러다 보니 공인구라고 해도 제각각 크기나 무게가 다릅니다.
야구 중계 중에,
간혹 투수가 공을 쥐고 있다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심판에게 다른 공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시지요?
이것은 손가락 감촉에 거슬리는 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공인구를 박스째 사다가 침대 옆에 쪼르르 늘어놓고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하나씩 번갈아 가며 쥐고 자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아아 대관절 나는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나 싶은 것입니다(한숨).
덧) 밥 먹고 졸리기도 하고, 궁금한 게 있어서 또 들어왔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내일 소개팅을 한다고 적은 거 보신 분만 답변 좀.
자꾸 이런 거 올려서 송구해요. 저도 환장하겄어요. 창피해서 어디 다른 데 가서 물어보기도 그렇고.
원래는 내일 다섯시에 만나기로 했거든요. 헌데, 문자가 왔어요.
“친구 결혼식이 다섯시라서 그런데 두시에 보면 어떻겠느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음. 2시로 시간을 바꾸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흐음. 근데 이거. 별거 아니긴 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약간 상하더라고요.
뭔가 힘이 될 만한 얘기 좀 해주십시오.
2014.03.14 14:23
2014.03.14 14:26
이미 알았다고 보낸 터라 그럴 순 없는데-.-;;
2014.03.14 14:23
-
2014.03.14 14:27
저만큼 잘생긴 사람도 우리 팀에서 드물기 때문이라도, 제 멋대로 판단한 채로 경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2014.03.14 14:35
-
2014.03.15 10:54
2014.03.15 10:54
2014.03.14 14:24
오오, 야구공 페티쉬는 듣도보도 못한 장르인데...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계시네요. (-.-)b
그리고 별로 힘이 되어드릴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그냥 "흠, 일정이 겹쳐서 시간이 바뀌는군' 정도로 건조하게 받아들이는 게 도움이 되실 것 같네요.
2014.03.14 14:29
이미 마음이 건조해지긴 했습니다. 될 대로 되라...라는 마음가짐이랄까...
2014.03.14 14:29
"그래도 괜찮지만 이왕이면 여유 있게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싶은데 차라리 다른 날에 뵙는건 어떠실지요? ^^ 바쁘시면 그냥 2시에 뵈어도 좋구요 ^^"
제 제안입니다.
기분 상한 티 내면 fail입니다.
2014.03.14 15:37
정답!
2014.03.14 14:31
2014.03.14 14:33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신거라면....식곤증을 달래는 진한 모카커피 한잔을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는 어떤 사람과 한두시간정도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대화를 나누며 보내는 시간으로 생각하세요. 그 자리가 너무 견디기 힘들정도로 지루하면 야구공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네요!!
2014.03.14 14:35
저도 그렇지만 아무리 소개팅에 임하면서 건조한 태도를 견지하려고 해도 참 뜻대로 안된다는...
윗분들 말씀대로 약속을 다시 정하든 만나든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결혼식 전에 보는거면 상대방의 더 화려한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2014.03.14 14:42
결혼식 전에 더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ㅎㅎ 저도 살짝 이 생각을 했습니다만.
2014.03.14 14:35
본문과 덧이 판이해 저는 일단 본문에 집중하겠어요.ㅎ 글을 읽으며 제가 처음 진짜 야구공을 잡았던 적이 생각났어요. 네, 다릅니다. 그것은 정구공, 탁구공, 당구공...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들과 마찮가지로 특유의 무게와 질감과 감촉이 있더군요. 적당히 묵직하고 적당히 파괴적이며, 딱 그 정도의 독특한 그립감이 있었어요. 단지 저는 동네에서 정구공과 양말 뭉쳐 꼬맨(!) 공을 주로 사용해서 그 이질적 느낌이 정말 맘에 안들었어요. 양말 뭉쳐 꼬맨 공을 던질 땐 마구도 던젔던 제가, 정구공으로는 포크볼과 체인지업, 심지어 슬라이더도 구사했던 제가, 진짜 야구공 앞에선 그저 포물선을 그리며 공을 한 곳에서 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존재밖에 될 수 없던 그 참담함이 실로 낮설었던 거지요. 거기다 그 압도적 파괴감이란!
그래서 저는 정구공을 던질 때가 더 좋았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또 다른 리그거든요. 우리는 굳이 메이저로 갈 필요까진 없는 것입니다. 정구공 동네리그를 메이저로 만들면 되는 것이죠. 하하하. 이 댓글이 뭔 소리인진, 어울리는 건진 모르겠지만, 왠지 이런 말을 하고 싶어 주절주절...
덧> 아니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야구공은 욕망의 대상, 야구시합은 소개팅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 그리 판이한 게 아니었군요. 아아, 이 기묘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이치란!
2014.03.14 14:38
어이구 두시에라도 만나주겠다는게 어딥니까. 저는 바쁜 스케쥴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어 만날 정도로 마음을 쏟는다는 의미로 해석할래요.
2014.03.14 14:45
저도 바쁜 와중에 '음, 다섯시 약속이니까 그럼 일찌감치 일어나서 도서관에 들렀다 경향 외고에 쓸 자료 좀 찾고 네시 반에 출발해서' 라고 스케줄을 쪼개둔 상태인데ㅠㅠ.
2014.03.14 14:41
친구 결혼식은 중요해서 웬만하면 날짜를 잊어버리지 않을텐데요...
제 경우는 날씨에 따라 무슨 옷을 입어야할 지 결정하기 때문에 한 보름전부터 계속 떠올라요.
제 생각은 5시에 다른 만남이 있거나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약속이 생긴 것 같아요.
2014.03.14 14:51
2014.03.14 15:05
음. 그렇다면 힘 닿는 데까지 그냥 최선을 다 하는 걸로 할까봐요...
2014.03.14 14:46
마음이 상했다면 소심한 복수차원에서 야구공을 손에 들고 가서 몰래 만지작 거리세요.
2014.03.14 14:51
오, 센스 있는 조언.
2014.03.14 14:49
다른 날로 바꾸시는게 좋을거 같습니다.
기브 앤 테이크.
2014.03.14 15:11
2014.03.14 15:15
마음에 안 들면 들면 그런 구실 덕에, 라... 아아 말씀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복 받으십시오. ...바야흐로 봄인가봉가....
2014.03.14 15:11
2014.03.14 18:01
김인식 감독님은 아니지만, 좋은 분이세요. 저한테 무이자로 대출도 해주신 적이 있거든요. 천만 원.
2014.03.14 15:41
"자꾸 이런 거 올려서 '송구'해요"
제 유머감각이 참 구리긴 한가 봅니다
2014.03.14 17:00
책들의 풍경님 개그 센스가 취향입니다. 으악!
야구공 만질 기회가 거의 없던터라 우연히 만지게 됐을때 '아니! 와일드한 스포츠 세계에서 맛 볼거라 상상도 못한 실키함이!' 하며 속으로 놀랐던 적이 있는데 이게 당연한거였군요.
야구는 섹시하지 않아. (주로 유니폼 쪽이..) 정도의 희미한 인상만 갖고 있던 저에게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설마 공이 섹시할 줄이야, 예상 외의 공격이에요.
2014.03.14 17:25
이런 글 너무 좋아요 훼훼훼
2014.03.14 18:01
고맙습니다, 간만에 글이 좋다는 칭찬을 다 받는군요.(실질적인 조언을 해달란 말이닷!)
2014.03.14 19:02
2014.03.14 20:21
1. 야구 이야기에 대해서 :
- 아마 좌완이라서, 가 맞지 않을까요.
- 폼이 괜찮다는 전제 하에, 스트라이드를 넓히면 미묘한 구속 증가를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막 넓힌 시기의 컨트롤은 8:45 (...)
- 그래서인지.. 전문 서적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작품들에서도, 투수란 존재는 달리기 및 스트레칭을 하며 하체 운동에 힘쓰고 있지요.
- 글을 보고 집에 있는 야구공들을 만져 보니 감촉이 좋긴 합니다만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는군요.
2. 소개팅 이야기에 대해서 :
- 보통 결혼식이라 하면 꽤 시간을 두고 결정된 스케쥴일 터인데, 급작스럽게 변경하는 건 이해가 안 가긴 하네요. 의문이 드실 법도.
- 뭐, 그래도 그 속상함을 엎어버릴 만큼 예쁘거나 매력적이면 별 수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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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하루키의 수필 같은 느낌이네요 ㅎㅎ
송구해요,도 왠지 야구용어로 들리구요.
소개팅상대에게는 "음 그럼 좀 더 여유있게 볼 수 있을 때 만날까요?"라고 하겠어요, 저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