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님 글 읽다가 갑자기 이 친구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일단 전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그렇게까지 많이 건너 뛰지는 않았어요. 숀 코너리 영화들은 대부분 봤고, 로저 무어 판은 하나나 둘 정도 건너 뛰었을 뿐이고, 티모시 돌튼 영화는 독파. 피어스 브로스넌 영화는 많이 튕기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물론 그 영화들에 대한 기억들은 많이 희미하고 또 잔뜩 뒤섞여 있지만. 왜냐? 전 그 영화들을 그렇게 안 좋아하거든요.


아마 그 이유는 제가 제임스 본드를 책으로 먼저 접했기 때문이겠죠. 가장 먼저 접한 것이 어린이판 닥터 노. (이 책 기억하시는 분? 어린이판 나폴레옹 솔로 책을 보셨다면 이 책도 함께 보셨을 텐데?) 그 다음에 삼중당판 카지노 로얄(그 때는 오히려 불어 표기에 가까웠던 카지노 르와얄르), 그리고 킹즐리 에이미스의 손대령. 그 다음에 궁금해서 다른 007 소설들도 조금씩 탐색. 그러는 동안 로저 무어 버전으로 입문을 했는데, 솔직히 영화 속 007은 소설 속 007에 비해 영 매력이 없더란 말입니다.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소설 속의 007은 훨씬 사람 같습니다. 몰입할 수 있는 모험 주인공이죠. 하지만 저에게 로저 무어는 제가 읽고 대충 머리 속으로 그리던 007의 패러디처럼 보였습니다. 내면이 없어보였어요. 혹시나 해서 숀 코너리 영화도 봤는데, 전 코너리의 본드는 몰입하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오로지 남성적 허세만이 존재한달까? 그런 기분이었죠. 조지 레젠비의 본드는 제가 아는 본드에 가까웠지만 배우가 너무 뻣뻣했습니다. 전 그래서 티모시 돌튼의 살인면허에 나왔을 때 오히려 제가 아는 007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 다음에 곧 피어스 브로스넌으로 건너 뛰고 말았죠.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는 저에겐 그냥 레밍턴 스틸의 스파이판이었는데 전 레밍턴 스틸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전 진짜 브레인이었던 로라가 좋았죠. 레밍턴 스틸은 그냥 무능한 방해꾼. 도대체 로라는 왜 저런 인간을 좋아하는 거야? 하여간 대니얼 크레이그의 카지노 로얄이 나왔을 때 제가 느꼈던 반응은 Q님과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어? 넌 낯이 익은데? 우락부락하고 금발이긴 하지만 너 혹시 제임스 본드니? 


전 영화의 스토리가 소설에 비해 너무 밋밋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레밍의 소설은 훨씬 S/M적이죠. 그리고 종종 예상하지 못한 인물과 플롯 진행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007 위기일발에서는 본드가 죽는 것처럼 끝나요. (물론 알고 봤더니 죽은 것은 아니어서 다음 편에 계속 나오지만. 질긴 놈.) 소설 보고 007 위기일발의 결말을 보니 이건 완전 사기. 뭔가 영화가 자꾸 설탕을 쳐요. 그나마 여왕폐하의 007이 플레밍 소설이 묘사했던 처절한 결말을 담고 있죠. 그런데 그 영화는 제가 기억하기론 거의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았던 영화였죠. 


아, 본드 걸도 있죠. 제가 영화 속 본드걸에 불만이었던 건 남성우월적 운운을 떠나서 원작의 입체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명한 본드 걸인 허니 라이더만 해도 소설 속 묘사만 본다면 전 진짜 불만이 없습니다. 의지가 강하고 똑똑한 인물이죠. 가장 흥미진진한 건 이 인물이 완벽한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는 거죠. 성폭행범에 맞서 싸우느라 코가 부러졌고 약간 보이시한 몸매를 갖고 있습니다. 우르술라 안드레스의 캐릭터 묘사도 나쁘지는 않은데 (트레인스포팅에 이 캐릭터에 대한 열광적인 묘사가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만) 아무리 봐도 어린 시절 강한 인상을 남겼던 '코가 비뚤어진 비너스'와는 다르더란 말이죠. 사실 007이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이런 육체적 장애나 정신적 상흔이 있는데, 대니얼 크레이그 이전 영화 속에서는 이것들이 대부분 무시되고 닦여집니다. (여왕폐하의 007는 예외.) 물론 제가 영화 속 푸시 갈로아의 묘사에 분노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전 아직도 끝에 가서 본드와 섹스하지 않는 푸시 갈로아를 보고 싶습니다. 지금 만들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까? 전 그게 본드 영화 규칙을 그렇게 깨는 것 같지도 않은데?


007 영화에 대한 리버럴한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어리둥절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단 전 007 영화가 냉전시절의 편견을 담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007 위기일발이 대표적이죠) 정말 소련이나 중공이 주악당으로 나오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요. 손대령이 본격적인 냉전 상대가 나오는 드문 소설들 중 하나였는데 그건 영화화되지 않았죠. 그건 냉전시대 첩보물 상당수가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데, 70년대는 냉전시대이기도 하지만 데탕트 시대이기도 했어요. 본드 걸 이야기만 해도 제 감정은 더 복잡합니다. 그러니 듀나가 007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라고 말하면 아, 그건 그런데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설명하자면 또 너무 이야기가 길어지고 그 쪽은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뭐, 그런 거죠. 요샌 소설들이 많이 번역되었으니 말이 통한다고 믿고... 하긴 최근에 책을 읽은 사람들은 저보다 이 문학적 인물로서의 007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하겠군요.


대니얼 크레이그는 두 편 정도 더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충분한 거 같습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어요. 그 본드가 과연 대니얼 크레이그가 만든 007의 인생을 이을 건지도. 그 쪽에서도 고민이겠죠. 대니얼 크레이그의 007이 가진 힘은 그 캐릭터가 시작이 있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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