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매매춘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매춘 합법의 독일보다 스웨덴의 매춘 정책에 더 공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윤리적 차원에서 벗어나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한국사회에서 접대문화를 거부할 수 있는 것도 개인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외모만이라도 유흥업소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일까.
한눈에 이성에게 빠질 때 그 사람의 직업은 차후의 문제이다.
사랑에 반대되는 표상처럼 보일지라도 매춘부의 역사는 상당히 낭만적이다.
과거에는 정략결혼이 대세였고 오히려 매춘부들이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예도 있었다.
기득권층의 귀족 남성이 매춘부에게 절대적 사랑을 주었다고 오해하지는 말기를.
자신의 세계를 모두 던지고 사랑에 올인하는 경우는 과거나 지금이나 희귀한 경우이다.
일본의 화류계에서 상급의 매춘부들은 고등교육으로 예능 감각과 사랑의 기교도 있었다.
황진이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생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오페라와 소설에 등장하고 영감을 준 그들의 직업은 창녀였다.
그들의 아내보다 더 빈번히 문학 작품에 등장한다.
'정직한 아내 중 창녀보다 칭송받았던 여자가 있느냐'고 혹자는 강변한다.
심지어 전략가 기질의 매춘부는 자신의 비범함과 아름다움을 이용해서 역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정략결혼만이 존재하는 시대도 아니고 천박한 자본주의의 결함으로 이 낭만성은 소실되고 배설의 피폐함만이 남았지만.
매춘의 낭만적인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시큰둥한 문학가가 등장한다.
매춘부가 우리에게 매력적이지 못한 이유는 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적극적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가지려고 하는 것을 미리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어떤 성장도 기대도 없다.
자신의 성욕을 해결해주는 직업여성은 필요하지만, 그 여성은 더럽다고 외치는 사람.
자신도 성을 샀기 때문에 더럽고 상대 직업여성만을 더럽다고 욕할 수가 없다는 사람.
나는 문학가도 사람도 후자의 마인드가 좋다.
충직한 노예를 칭송하는 문학작품이 존재한다고 노예제도가 낭만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매춘의 낭만적인 역사라니, 성병과 감금, 매독의 역사는 어디로 치워버리시고 몇몇의 고급창녀들을 데려다 낭만으로 금칠을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