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7 23:57
안녕하세요.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온 각설이입니다.
이 글은 개인사와 편견, 사견이 들어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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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게에도 썼지만 얼마 전에 입원을 했습니다.
정신과에 외래진료를 다닌 건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만 입원은 처음입니다.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간 정신과 병동은...
정말로 지루했습니다.
무료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입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래 고심을 했었습니다.
입원 신청을 해 둔 시점에 갑자기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이지요.
자살 사고도 많이 사라졌고 조금이나마 세상이 한 톤 밝게 칠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입원 대기 시간은 2주 정도 걸렸는데 상태가 좋아진 것도 딱 2주쯤 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도 입원 신청을 기왕에 해뒀으니, 그리고 내 상태가 또 언제 나빠질지 장담할 수 없으니 입원을 하자!하고 결심을 하고 입원을 했습니다.
사실 입원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 기대를 했습니다.
뭔가 입원하면 여러 가지 스케줄에 맞춰 검사도 하고, 치료도 받으면서 나름 계획적인 하루를 보낼 것이라고요.
그런데 막상 입원하니 별로 하는 게 없었습니다.
하루 하루는 무료해 죽을 지경이었고, 할 일이 없는 환자들은 모두 복도를 계속 유령처럼 왔다갔다하거나 티비 앞에서 멍하니 있거나, 종일 잠을 자면서 시계가 움직이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집단치료라는 이름 하에 그림을 그리거나(대체로 그림이라기에도 그렇고 낙서에 가까운) 하루 두 번의 차모임을 갖거나, 하루 세 번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거나, 가끔 붕 뜬 기분을 가진 환자분들이 노래를 하거나 하는 것을 듣는 것 외엔 공허한 스케줄이었죠.
아니, 다른 무엇을 떠나서도 심심했습니다. 정말로. 궁서체로 적고 싶을 만큼 간절하게 심심했습니다.
폐쇄병동인 줄 미처 생각지 못하고 휴대폰과 노트북을 챙겨갔는데 당연히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심심하게 만들어서 말려 죽이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반농담처럼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병동은 넓지도 않고 그저 작은 하나의 복도와 6인실 병실 두 개, 5인실 병실 하나, 1인실 병실 2개와 세 개의 면담실과 한 개의 집단치료실(이란 이름의 식당)이 전부인 소박하다면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창문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모두 창살이 쳐져 있어서, 처음 들어온 날 창가에 서 있던 어느 환자의 뒷모습은 왜 그리 쓸쓸해보였는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세간에서 갖는 정신과에 대한 편견은 저도 익히 가져본지라, 잠긴 문과 창살을 보고 약간 겁먹기도 했습니다.
아, 내 발로 들어온 곳이지만 왠지 갇혀버린 것 같다.
비록 감옥은 아니지만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사는 곳이라, 가끔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카드 게임을 하거나 보드게임을 하거나 했습니다.
농담을 하거나 하면 크게 웃어도 보았습니다. 작은 농담이 그렇게 웃기던 적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처음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9일 정도 보냈군요.
하루 한 번 볼 수 있는 주치의 선생님과의 대화 이외엔 무엇도 긴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그리 길지 않았지만.
어쨌든 시간이 아까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공짜도 아니고 비싼 병원비를 내면서 무위도식하고 있자니 뭔가 조금이라도 건설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지더군요.
지독한 심심함 때문이었지만.
계속 자면서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걸렸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대로는 시간과 돈의 낭비다 싶어 퇴원을 결심했습니다.
기분은 계속 나쁘지 않은 상태였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완전 헛걸음이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크게 웃고 지낸다는 것을 잊고 있었거든요.
밖에서 지낼 때는 누구도 대화할 상대가 없었고, 간혹 대화할 일이 생기더라도 어쩐지 긴장하게 되었었죠.
사적으로 얘기할 기회는 전무했고 혹 있다고 했더라도 길게 얘기할 수 없었을 거에요. 누구에게든 내 얘기를 한다는 게 폐처럼 생각되어 꺼려졌거든요.
그러나 병원에서는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을 만큼 무료했고, 서로 같은 환자의 입장이라 더욱 말문을 열기 쉬웠던 것 같아요.
오래간만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크게 또 웃고...
그런 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정신을 치유시켜주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누군가의 즐거운 대화를 갈망하고 있었는지도요.
병동엔 다행히도 고등학생이거나 갓 고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어서, 더욱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점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을 떠나왔지만, 좀 섭섭하기도 하고 뭔가 마음에 찡하게 남아 있는 느낌이 들어요.
길고 짧은 9일이었지만 정이 들었던 걸까요.
어쨌든 전 다시 일상을 시작하고 또 괴로운 시간을 부딪혀가야 하겠지요.
용기를 내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람과 접촉하며 사소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찾아야겠죠.
그것만으로도 제 마음은 조금이나마 치유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루미큐브라고 혹시 아시나요?
보드게임의 일종인데 병원에서 알게 됐어요. 잘 하지는 못하지만 재밌어서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을 하려면 최소 3명은 있어야 재미있더군요.
난제이지만 어디 보드게임 동아리라도 찾아봐야 할까봐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찾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오프라인 모임이 있으면 언제 기회를 내어서 찾아다니고 해야겠습니다.
뭐, 아직은 먼 후일의 이야기겠지만요.
지금은 꿈에 지나지 않더라도... 이루도록 노력을 해야겠지요.
그동안의 전 대부분의 일들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피할 핑계를 만들면서 안 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10중 9를 피하던 것을 7, 8 정도로 줄여 보려고 아주 목표치가 낮게나마 설정해봅니다.
용기를 내어야겠습니다.
용기를 낼 거에요.
쓰다보니 이런 시간이네요.
좋은 밤 되세요.
2014.06.28 00:03
2014.06.28 00:05
좋은 경험하셨어요.
네 같이 용기를 내어요.
병원 어슬렁거리기 환자 보호자로 오래 있어봐서 압니다.
2014.06.28 00:05
결국 필요한 경험을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에아렌딜님께서 더 밝고 밝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나아가시길 응원해요~!! :D
2014.06.28 00:15
2014.06.28 00:16
폐쇄 병동이란게 세계를 가두고 자신을 쉬게 하는 곳이었군요. 시간을 멈추고 틈바구니에 들어가 낮잠자는 것처럼요. 다만 다른 점이라면 비용을 부담해야하기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의 값어치를 계속 자각한다는 단점이 있군요. 지루함의 반대항에는 빡빡함이라던가 성실함을 넣어볼 수 있겠는데, 비용에 대한 본전을 가혹하게 추구하시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에아렌딜님이 가지신 변화나 개선에 대한 충만한 욕구는 확실히 알겠지만, 그 비중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육중하게 짓누르게 되는게 아닌가 싶어요. 의욕은 행동으로 바꾸고 부담에선 빠져나오시길 바랍니다. 저도 상담 받고 있는데 상담은 그 상담 과정에서 효용을 느끼기보다 상담의 부재에서 더더욱 강하게 체감할 수 있더라구요. 이런건 제 생각이고 노력하시는 것들이 성취의 선순환을 통해 만족함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2014.06.28 00:22
2014.06.28 00:38
잘 오셨습니다, 정말 님의 글을 기다렸습니다.
루미큐브, 우노, 카탄 등을 해보세요.
다 서너 사람이 할 수 있고, 간단하면서도 재미있는 게임입니다.
젱가나 얏찌 도 재밌습니다. 한때 보드게임이 좋아서 주말마다
멀리 있는 보드게임방에 여러 친구들과 모였었는데, 그 안에서도 서로
더 좋은 사람 덜 좋은 사람 더 싫은 사람 덜 싫은 사람 생기고
누군 누굴 싫어하고 누군 누굴 좋아하고 이렇게 되니 결국 깨지더군요 ㅠ.ㅠ
2014.06.28 01:01
재미 있을턱이 없는 상황인데....에아렌딜님 글 읽고 처음으로 살짝 피식 웃게 만드는 재미 있게 쓰셨어요;;;
용기라니....이게 이렇게도 참 설레이는 말이었군요.
2014.06.28 01:03
글이 조금 밝아졌어요. 본인이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2014.06.28 01:30
암...누가....거기를 다녀오고...아주...잘 회복되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씀 전해드립니다...
2014.06.28 01:47
소식 기다리고 있었어요. 뒤늦게 글을 읽을 때도 있고,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써지지가 않아서 한참 고민만 하다가 그만둔 적도 많지만
항상 소식 기다리고 있어요. 푹 주무시고 내일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드시고 싶으셨던 거로 즐겁고 맛있게!
요즘 맛있는 과일이 참 많아요. 수박도 자두도 참외도. 달고 상큼한 과일도 드시며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반가워요!
2014.06.28 04:42
2014.06.28 07:13
금요일 밤, 토요일 아침을 아 피곤해 피곤해 힘없어 이러면서 축 늘어져 있다가 에아렌딜님 글을 읽으니까 저도 좀 기운이 납니다. 길고도 짧았던 9일동안 전 출장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 입원하기 전 심리상태를 무기력하다고 하셨는데, 이 글에서는 뭔가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병원을 떠나왔지만, 좀 섭섭하기도 하고 뭔가 마음에 찡하게 남아 있는 느낌이 들어요." 이 문장의 울림이 무겁고 또 참 좋습니다.
2014.06.28 08:59
행복하셨으면 해요...
2014.06.28 09:14
모두들 이리 반가워하실줄 예상하셨을까요?
조금씩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시길..
듀게에 보드모임 주선하시던 이인님.. 어디가셨나요?? ㅎㅎ
2014.06.28 10:16
2014.06.28 11:11
2014.06.28 11:34
자조모임이란 것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죠. 에아렌딜님은 극도로 사람을 피해왔지만 모두 나와 다를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거든요.
2014.06.28 20:16
근래 본 에아렌딜 님 글 가운데 가장 밝은 글인거 같습니다. 정신병적인 이상이나 우울감도 전혀 느낄 수 없구요.
'지루하고 심심했다'는 얘기는 뭔가 하고 싶었다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 아닐까요? 루미큐브도 하고 천천히 재미있게 사세요.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