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11 18:38
리처드 플레이셔의 [바이킹]은 제가 언제나 궁금해했던 영화였는데, 그건 한국의 소위 '추억의 영화' 팬들이 이 영화를 언급하는 걸 이상할 정도로 자주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명세의 [개그맨]에서도 배창호의 이발사 캐릭터가 '좋았던 옛날 영화'의 예로 이 작품을 언급하지요. 하지만 정작 밖으로 나가면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별로 찾을 수 없단 말이죠. 당시엔 히트작이었던 것도 맞고 커크 더글러스 팬들이라면 당연히 이 영화도 알겠지만요.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결국 이 영화를 봤는데, 전 여전히 이 영화의 특별한 장점은 잘 모르겠더군요.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영화는 타피스트리 배경으로 오슨 웰즈가 굵은 목소리로 나른하게 읊는 중세 바이킹에 대한 정보로 시작됩니다. 바이킹은 오딘을 섬기고, 배를 잘 만들었고,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들은 전쟁터에서 죽으면 발할라에 갈 거라고 믿었고, 유럽 근방에서 해적질을 하고 다녔고, 그런 내용들이죠.
그 다음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라그나르라는 바이킹 두목의 배다른 자식들이 치고받는 막장 드라마예요. 라그나르에게는 에이나르라는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은 에릭이라는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데, 알고 봤더니 에릭은 라그나르의 배다른 아들입니다. 브리튼섬의 노섬브리아 나라의 왕비가 라그나르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과정이 로맨틱한 연애와는 거리가 멀다는 건 짐작하시겠죠)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지내던 그가 그만 여행 중간에 바이킹에게 사로 잡혀 노예로 끌려온 거죠. 둘은 서로가 형제라는 것을 모르는 채 인질로 끌려온 웨일즈의 공주 모르가나에게 빠집니다. 모르가나는 누굴 좋아하냐고요? 공식적으로는 모범적인 주인공인 에릭을 좋아하는데, 속으로는 야수 같은 에이나르에게 성적매력을 느낀다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선악이 분명한 영화는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브리튼섬의 기독교인들이나 스칸디나비아의 이교도들이나 다 폭력적인 야만인들이에요. 그나마 우린 에릭 캐릭터를 선악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스토리를 바라보는 데에 큰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암투나 전쟁은 자연재해에 가깝습니다. 한쪽 편을 들면 피곤해져요.
영화가 역사를 얼마나 진지하게 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약간의 조사를 했는데, 라그나르라는 인물은 스칸디나비아의 유명한 사가의 주인공이라고 하고 영화에 나오는 노섬브리아의 왕 아엘라 역시 그 사가의 등장인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들들 이야기는 허구인 것 같고. 하여간 에디슨 마샬의 원작 소설은 역사를 조금 더 꼼꼼하게 다루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리처드 플레이셔의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익숙한 바이킹과 중세 유럽의 뻔한 이미지를 모델로 삼아 큰 붓으로 대충 쓱쓱 그린 그림처럼 보이죠. 브리튼인들과 바이킹 양쪽을 비교한다면 전 여기서 바이킹 쪽이 더 손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진짜 바이킹들이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규율도 없고 무식하고 단순하고 멍청한 무리들이었다면 역사에 등장하기도 전에 전멸당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바이킹의 야만성이야 말로 당시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이유라고요. 영화는 극중 캐릭터들에게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고유의 윤리 체제를 주고 그 안에서 마음껏 수컷들의 야수성을 터트리게 해주는데, 그게 한국 (남성)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해방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거죠. 물론 약간의 인류학적인 재미도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거고요.
보기 좋은 영화입니다. 잭 카디프가 노르웨이 로케이션을 이용해 근사한 화면을 찍어냈죠. CG로 도배되고 CF 속도로 찍어낸 요새 영화들에 비하면 느리고 투박하지만 요샌 그런 게 오히려 더 좋더군요. 커크 더글러스, 토니 커티스, 어니스트 보그나인, 자넷 리는 딱 그 당시 할리우드 스타들에게서 기대할 만한 정도의 스타성을 보여주고요. 향수 섞인 느긋한 기분으로 감상하기엔 좋아요. 단지 그 향수를 넘어서는 특별한 매력은 못 느끼겠단 말이죠. (11/05/11)
★★★
기타등등
1. 에이나르는 이 영화에서 수염을 기르지 않은 유일한 바이킹이에요. 그게 어색했는지 라그나르가 "내 아들은 외모에 너무 신경을 써서 영국인들처럼 면도를 한다"라고 변명까지 하죠. 아마 커크 더글러스의 턱 보조개를 수염으로 덮으면 스타의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하긴 더글러스는 제작자이기도 했으니...
2. 라그나르로 나온 어네스트 보그나인은 사실 더글러스보다 연하예요.
감독: Richard Fleischer, 출연: Kirk Douglas, Tony Curtis, Ernest Borgnine, Janet Leigh, James Donald, Alexander Knox, Maxine Audley, Frank Thring
IMDb http://www.imdb.com/title/tt0052365/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843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3 | 비공식작전 (2023) | DJUNA | 2023.08.04 | 1876 |
22 | 출구는 없다 No Exit (2022) [2] | DJUNA | 2022.04.11 | 2353 |
21 | 테이킹 The Taking of Deborah Logan (2014) | DJUNA | 2020.11.01 | 2681 |
20 | 쥐덱스 Judex (1916) | DJUNA | 2014.09.11 | 2922 |
19 | 익스트랙션 Extraction (2020) [3] | DJUNA | 2020.04.26 | 3150 |
18 | 쥐덱스 Judex (1963) | DJUNA | 2014.09.11 | 3183 |
17 | 눈의 여왕 Snezhnaya koroleva (1957) | DJUNA | 2015.03.02 | 4288 |
16 | 선지자의 밤 (2014) [4] | DJUNA | 2015.09.22 | 6092 |
15 | 툼스톤 A Walk Among the Tombstones (2014) [1] | DJUNA | 2014.09.27 | 6403 |
14 | 오픈 윈도우즈 Open Windows (2014) [1] | DJUNA | 2014.07.31 | 6504 |
13 | 맨홀 (2014) [4] | DJUNA | 2014.10.08 | 7060 |
» | 바이킹 The Vikings (1958) [2] [2] | DJUNA | 2011.05.11 | 7307 |
11 | 하이네켄 유괴사건 De Heineken Ontvoering (2011) [1] [2] | DJUNA | 2012.08.18 | 8410 |
10 | 포스 카인드 The Fourth Kind (2009) [1] [3] | DJUNA | 2010.02.21 | 8629 |
9 | 23 아이덴티티 Split (2016) [1] | DJUNA | 2017.03.04 | 8904 |
8 | 카운슬러 The Counselor (2013) [6] | DJUNA | 2013.11.22 | 11019 |
7 | 헤드 (2011) [5] [1] | DJUNA | 2011.05.19 | 116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