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 수요일 아침에 사표를 냈습니다. 고착 8개월짜리 신참이 사표를 냈다면 그 이유는 뭐, 크다면 크고 사소하다면 사소하죠.

일터에서 나를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느낌을 견디며 여기서 커리어를 쌓은 다음엔?

바로 그 비전이 제가 생각하는, 제가 살고 싶은 인생과는 너무 다르더라 이겁니다. 원래 좀 욱하면 빡 지르는 경향이 있어서, 부처님 오신 날 뒹굴대는데 문득 그만두자, 생각하고 다음날 사표를 냈죠.

 

그래요 뭐, 문학판에서 글 끄적이며 공부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같은거 이미 인생 크게 꼬인 시점에 깨끗하게 팽개쳤으니 살고 싶은 인생 원하는 비전 운운할 계재도 아닌데 말이죠. 

그리 부르짖던 백수건달, 쌍문동 한량즈의 미학을 고수하며 방구석에 코 후비고 들러붙기엔 먹여살려야 할 애가 둘이고(고양이 키우는 데 학비가 안 들어서, 그건 참 다행이에요, 반농반진.)

자 그래서, 그만두면 뭐할거냐? 이거 그만두고 뭐 글케 대단한 거 할거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 넉넉하지 않은 봉급이긴 했지만서두, 어쩜 그리 매번매번 깨끗하게 다 썼는지 딱 2주도 탱자탱자 여행다니며 쉴 여력이 없더군요.

결국 제일 잘하는 거, 여태 해왔던 거 다시 하기로 했어요. 천직이다 생각은 안 들어도 이걸 하면 적어도 좀더 편안하게 먹고살 수 있는 건 확실하니까.

그러나 역시 장기적으로 내다보자면...아아 정말 난 이걸 평생 할 생각은 없는데. 전혀. 이래요. 이러면 또 비슷한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하는 거겠지만 사표는 질러놨으니 목구멍이 포도청.

게으름을 지향하는 성격치고는 꽤 추진력이 있는 편이어서, 사표를 내자마자 이력서를 들이밀기 시작해 5일째인 오늘 총 세 곳에서 합격통지를 받았죠. 지금 다니는 곳보다야 여러 모로 낫지만

사실 고만고만해요. 딱 제 능력만큼, 고 깜냥만한 자리들이죠. 사표 질러놓고 훅 한방, 인생에 그런거 없잖아요. 내가 아는 그 곳에서만 맴맴맴맴.

 

학부때 토익공부가 너무너무 싫어서 토익 없이도 취업해 보이겠노라고 호언장담하고, 남들 자격증 따고 봉사활동하고 서포터즈니 공모전이니 바쁘게 돌아다닐 때 술병 끼고 시 쓰는 궁상청춘놀이에 흠뻑 빠졌었고,

그때야 대학원 갈 생각에 취업생각은 눈꼽만치도 안 했었지만 어쨌건, 아무 준비 없이 맨몸뚱이로 세상에 널부러졌을 때 제가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상당히 제한적인 것들 뿐이더라 그거예요.

그렇게 초라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대수롭거나 빛나 보일 것도 없는, 연하고 탁한 먹물을 툭툭 아무렇게나 찍어버리는 듯한 느낌의 나날들이었죠.

한 2년 정도는 먹고살겠다고 눈코뜰새없이 지내느라 자기반성따위 할 틈이 없었지만.

얼마전 출근하는데, 길가에 버려놓은 커다란 전신거울 속 제 모습을 보면서 아, 나는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는, 살 수 없겠구나.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무라카미 류의 식스티나인을 보면 끝무렵에 주인공의 첫사랑인 레이디 제인, 마츠이 다카코의 편지를 곱씹으며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쳄발로 소리같은 느낌으로 살아갈 것이다' 운운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마 있을걸요;;; 그냥 문득, '쳄발로 소리'라는 수사가 생각나더군요. 그게 뭔진 몰라도, 내가 그렇게 살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난 좀, 아니네. 체에에엣.

 

그렇게 부우, 하고 성질나서 사표를 내지른 뒤 잽싸게 돌아간 자리가 결국 똑같은 거기라는 생각을 하니 뭐 이래, 하면서 피시시식 바람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좀 다른 거, 더 신나는 거, 더 재밌는 거 하면서 살면 안되나. 그런거 하면서 빚도 갚고 집세도 내고 애들도 먹이고 나도 맛난거 먹고 이쁜 옷 입고 좋아하는 책 사 읽고 할 만큼 버는 게 그러어어어어어엏게 말도 안되는 일인건가? 

말이 안되는 일일지도 몰라요. 그게 말이 안 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다는 제 생각이 더더 말이 안 되는 걸수도.

 

사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을 위해 일하고, 여가시간을 위한 여가시간을 살고, 다들 그렇게 사니 나도 그래야 하는 게 기실은 당연할 텐데, 이정도면 나름 하고 싶은 건 고집대로 하며 막 살아온 것도 맞으니까 이쯤에서 적응해야 하나?

그래서 오늘 세 번째 면접을 보고, 합격 비슷한 소리를 듣고 난 뒤에(이쪽일은 이상하게 가면 붙어요) 터덜터덜 집으로 오면서 소박한 상속녀의 꿈을 꿔봤습니다.

힐튼가도 말고 경기부근 알부자 삼양모텔집 고명딸 정도. 그리 위세돋게 떵떵거리지 않아도 되니까 벌어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정도. 어 뭐...좀 더 쓰면, 아빠네 세번째 건물 일층 폰마트 바지사장, 이런 것도 참 좋겠네요 푸하하하하.

 

적어내려가다 보니 좀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좀 재미없고 지루하고 그렇지만, 아직 앞으로 어떻게 놀고 싶은지가 머릿속에 가득 있고, 뭘 하고 싶은 지가 자꾸 떠올라서 반가워졌달까.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재밌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한, 저는 무채색 인간이 아닌 거겠죠. 알토란 삼양모텔집 상속녀한테 고양이 알러지가 있다는 전제 하라면 해볼 만한 게임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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