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4 12:36
비올렛 르뒥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라들러 메츠거의, 소문만큼 음탕하지는 않은 기숙학교 로맨스 영화 [테레즈와 이자벨]의 원작자이고 시몬 드 보브와르의 팬이자 친구였다는 것이었죠. 바이섹슈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결혼 경력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았습니다. 대충 이 정도인 10년 묵은 서핑 정보만 가지고 얼마 전에 LGBT 영화제에서 상영한 마르탱 프로보스트의 영화 [비올렛]을 보았는데요... 아, 이 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군요!
영화는 비올렛 르뒥이, 그렇게 평판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유대인 게이 작가 모리스 삭스와 위장결혼 생활을 하면서 암시장 일을 하던 제2차세계대전 중반부터 출발합니다. 르뒥은 당시 30대 중반. 르뒥의 집착에 지겨워하던 삭스는 곧 달아나버리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글을 쓰라는 충고는 해주더군요. 삭스가 떠난 뒤 르뒥은 시몬 드 보브와르의 [초대받은 여자]를 읽고 드 보브와르의 팬이 됩니다. 자기 인생 이야기로 책 한 권을 뚝딱 쓴 르뒥은 다짜고짜 드 보브와르의 아파트로 찾아가 원고를 넘겨주는데, 그 작품은 드 보브와르의 도움으로 갈리마르에서 출판이 되지요. 그 뒤로 비올렛 르뒥과 드 보브와르의 수십 년에 걸친 끈질긴 인연이 시작됩니다.
프로보스트가 그린 르뒥은 멀리서 구경하는 건 재미있지만 가까이 두고 싶지는 않은 사람입니다. 성격 안 좋고, 인간관계 서툴고,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심지어 아이돌 사생팬이에요. (그 정도면 성공한 사생팬이긴 하지만.) 이 사람이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제가 먼저 창피해질 정도입니다. 모리스 삭스에게 매달리는 도입부 장면부터 오글오글한데, 마흔이 넘어서도 엄마보고 왜 자기를 낳았냐고 떼를 쓰고, 서점에 자기 책이 없는 걸 알고 난동을 부리고... 그러면서 자긴 작가가 아니라 작가 친구라고 거짓말을 하는데 그게 더 부끄러워요.
르뒥 주변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런 어거지 땡깡에 관대합니다. 따지고 보면 가장 난처한 상황에 있는 시몬 드 보브와르는 르뒥의 온갖 투정을 다 받아주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아요. 무엇보다 장 주네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 친절 때문에 르뒥이 더 염치없이 굴었던 것이겠지만.
예술가로서 르뒥은 거의 짐승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론도 없고 계획도 없어요. 있는 것이라고는 고통과 욕망에 젖어있는 인생 자체와 언어를 통해 그를 직조할 수 있는 본능적인 능력입니다. 아마 그 희귀함 때문에 원고 하나 달랑 들고 당대 프랑스 최고 지성인들의 클럽 안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이 무명 작가에게 다들 친절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르뒥과 드 보브와르의 이야기는 고통스러운 짝사랑을 담은 연애담이지만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드 보브와르는 르뒥을 지원하고 격려하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자신의 지적, 정치적 사고틀 안에 그녀를 끼워 맞추려고도 하죠. 영화의 드라마 대부분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향과 의도,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결과가 꽤 좋았다고 봐야겠지요. 영화의 드라마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결국 르뒥이 온전한 작가로서 완성된 것은 드 보브와르 덕택일 테니까. 적어도 그게 영화가 말하려는 거겠죠.
(14/06/24)
★★★
기타등등
모리스 삭스에 대해 궁금해서 조금 더 검색해봤죠. 위키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동료들이 린치해 죽인 뒤 시체를 개에게 먹으라고 던졌다는 소문이 있다고.
감독: Martin Provost, 출연: Emmanuelle Devos, Sandrine Kiberlain, Olivier Gourmet, Catherine Hiegel, Jacques Bonnaffe, Olivier Py, Nathalie Richard, 다른 제목:
IMDb http://www.imdb.com/title/tt297692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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