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22 00:36
이 글의 발단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에서 시작됩니다.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한 그의 평은 블로그에 실려있습니다. (http://blog.naver.com/lifeisntcool?Redirect=Log&logNo=130187774173&from=postView)
제가 처음 그랜드 부다페스트의 한줄평을 읽었을 때, 그리고 이동진 기자의 한줄평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이 반응이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발생했는지 처음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에 실린 평을 읽고 나서, 그동안 이동진 기자의 한줄평에서 받아온 불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런 불편함의 정체를 밝히고, 더 나아가 제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 와 평 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쓴 글입니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은 슈테판 츠바이크에서 그 영감을 시작한 듯 '보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분명히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리고 있고, 액자식 구성에서 나오는 '작가'는 분명 츠바이크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대놓고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의 첫 단락을 대사로 차용하고 있죠. 그 단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 (...) . 작가란 언제나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 채 무궁무진한 소재를 가지고 끊임없이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작가는 직접 이야기를 창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인물과 사건이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눈여겨보고 귀기울이는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마련이다. 운명을 좇는 자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 이 이야기 또한 뜻하지 않게 누군가가 내개 들려준 이야기를 거의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 단락이 영화의 서두에 거의 그대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실겁니다. 물론 이 소설이 영화의 내용과 분명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소설은 오히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이며 주제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둘러싼 인간에 대한 성찰입니다. 하지만 분명 저 첫 단락에서 읽히는 츠바이크의 '태도'를 영화 속 작가-이야기의 태도로 결부하고 있다는 것은 보시다시피 사실이죠.
이동진 씨는 아마도 이 영화에서 "슈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그가 읽은 것으로 '보이는' "어제의 세계"란 책이 곧바로 생각이 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런 한줄짜리 평이 가능해지죠. 그는 평에서 어제의 세계란 단어에 따옴표를 사용해가며 분명히 영화에서 언급하고 있는 츠바이크에 방점을 찍고 ' 향수'라는 주제의식을 살리고 있습니다. 저의 문제의식은 그의 이런 한줄짜리 평이 평론가들의 클리쉐. '자신이 아는 것만 나오면 읽은 것을 갖다부치는 못된 습성'처럼 읽힙니다.
츠바이크의 소설들은 대부분 '비극'에 가깝습니다. 츠바이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전기작가인 동시에 소설가이고, 무엇보다 20세기 초중반의 유럽의 비극, 전쟁을 겪으며 항상 고난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시절에 관한 향수"를 그리는 작가가 아닙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작품들, "광기와 우연의 역사" " 발자크 평전" "천재 광기 열정"을 비롯해 여러 단편소설과 몇 안되는 장편은 분명히 '광기와 고통에 처한 인물'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번역된 '초조한 마음 (or 연민)' 의 옮긴이 해설에는 이런 츠바이크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츠바이크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기 전에 살았던 유럽, 벨 에포크 시대와 같은 '영광'을 그리는 책이 아닙니다. 그는 이 자서전을 집필하고 난 뒤에 같은 해 (1942년)에 브라질이란 낯선 땅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위 옮긴이 해설에서 읽히듯, 그는 그 시대를 '향수'와 '그리움'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닌 '고통과 광기'로 해석하고 있고, 그런 시절에 대해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입니다.<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그려지는 향수와 아름다운 미장센들은 그가 생각했던 시절과는 확실한 거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는 단지 츠바이크의 소설과 시대에 "모티브"를 얻었을 뿐, 그의 작품과 세계와는 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짚고 싶은 문제는 이런 츠바이크의 삶과 시대에 대한 진짜 성찰과는 전혀 "관계없이" 쓰고 있는 이동진 기자의 '장식적인 인용'입니다. 영화에서 언급된 츠바이크를 보고, 자신이 읽은 책과 지식으로 자신의 해석을 '포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어떤 인용과 수사를 빌려온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엄격하게 그 인용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전제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엄격한 잣대죠. 그러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과 이동진 씨의 평에는 "츠바이크"가 있지만, 그 츠바이크는 츠바이크가 아니라, 단지 장식적으로 쓰이는 "츠바이크"에 불과합니다. 쉽고 거칠게 말하자면 그냥 있어보이고 싶어서 어제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줄평 마지막에 그가 덧붙인 "근원적 노스텔지어". 이동진 씨가 쓰고 있는 이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와 , 제가 그동안 느껴왔던 이동진 씨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대체 "근원적 노스텔지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질문은 위에서 논의한 "츠바이크 인용"에서 느껴지는 문제와 같은 방식의 아이러니를 안고 있습니다.
츠바이크는 '노스텔지어'의 작가가 맞습니다.이 단어가 그의 주제의식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동진 씨가 쓰고 있는 "노스텔지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노스텔지어를 츠바이크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로써 말이죠. '노스텔지어'라는 말은 보통 '향수/ 그리움'이란 말로 쓰이지만, 사실 이 단어는 '그리움'이란 뜻과는 거리가 있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어원과 뜻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입니다. Nostalgia 에서 Nost = Home 이며, Alg = Pain. nostalgia = yearing for home 입니다. 노스텔지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장소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의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죠. 물론! 이 말이 보편적으로 향수와 그리움으로 언급되는 단어로 쓰이는 것은 맞지만, 츠바이크의 "노스텔지아"는 오히려 원 뜻에 가깝습니다. 그의 실제 생 또한 그렇죠. 자신의 고향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유럽을 뒤로 하고 남미로 망명한 작가의 생과 그의 비극적인 선택-자살-은 정말 '노스텔지아' 그 자체입니다. 그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노스텔지아-고통으로 쓰인 책이죠.
그러나 '평론가' 이동진 씨는 아주 낭만적으로 "어제의 세계"를 언급하면서 "근원적 노스텔지아"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시종 일렁이는 영화입니다. (그게 이 영화가 끝날 때 자막을 통해서 '어제의 세계'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겁니다.) 미국인인 웨스 앤더슨은 자신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그와 같은 특정한 시공간에 대한 향수를 수많은 문화적 레퍼런스와 개인 경험을 뒤섞어가며 독창적이고도 아스라한 느낌을 주는 동화로 그려냈습니다. 물론 극중 시공간은 정확히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그 자체를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물론 노스탤지어에 대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어제의 세계'에 대한 달콤쌉싸름한 회상의 감각은단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제로 무스타파의 것만은 아닙니다. 그건 또다른 주인공인 구스타프의 것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직접 경험한 적 없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옮김으로써 간접 체험하는 이 영화 속 작가나 독자, 즉 세상의 모든 예술 창작-향유자들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상실의 경험이 아니라 간접적인 상실감입니다.) 그러니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음에도 그 세계가 사라진 것에 대해 관객들이 나직하게 탄식을 내뱉으며 노스탤지어에 젖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말해서 예술이야말로 바로 그렇게 직접 경험한 적 없었던 세계와 시간에 대해 향수를 느끼도록 하는 것일 겁니다. (부디 그걸 거짓 향수라고 하지 마시길.)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이 속해 있는 곳은 결국 우리가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이겠지요.
그가 Feel 을 받고 계속 쓰고 있는 단어 "노스텔지아" "어제의 세계"를 만약에 위와 같은 츠바이크에 대한 이해와 그가 치른 시대에 대한 감수성을 알고 읽는다면, 아마 괴리감과 불편함만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치 "마담 보바리"와 "안나 까레니나"를 "사랑-로맨스 소설"이라고 얘기하는 듯한 불편함 말이죠. 영화 "세월"을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의 이런 지적이 마치 "꼬투리 잡기" "말꼬리 잡기"로 보이실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그는 저 글에서 츠바이크와 노스텔지아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해석의 주제로 인용하면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 '어제의 세계'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 ? [근원적 노스텔지아] ? [간접적인 상실감] ? ['어제의 세계'에 대한 달콤쌉싸름한 회상의 감각] ? 아마도 이런 감상들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나름의 감상은 될 수 있어도, 츠바이크, 혹은 그 시대에 대한 "올바른 감수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죠. 이건 마치 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시절의 경제발전 시기를 "아름답게 그리워하는" 조선일보 애독자같은 해석처럼 느껴진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비아냥일까요.
<그랜드 부다페스트>는 그 자체로 정말 아름다운 영상미와 이야기를 지닌 작품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의 현실은 그런 동화책으로만 묘사하기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당시를 살았던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치른 "고통"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설령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이 "아름다움"을 누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산산조각 났는지를 떠올린다면, "아 그때가 참 좋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날릴 것만 같은 사람들의 글이 분명 역사에 실재하고 있습니다. 단지 "향수"니, "근원적 노스텔지아"니 라고 언급하며 포장하며 인용하기에는 정말 "전쟁같은 시대"였으니 말이죠. 이동진 씨의 평에는 그런 시대에 대한 감수성이 부재한 채, (혹은 생략한 채) 낭만적인 영화에 대한 해석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포장하고 있습니다. "근원적"의 근원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스텔지아란 단어의 "근원"은 분명 "고통"입니다. 이동진 씨의 평에는 이런 고통에 대한 감수성-츠바이크의 삶-이 부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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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로저 에버트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흥미로운 우디엘런에 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우디엘런은 1970년대부터 2000년 까지 그는 매일 '자살'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생각은 평생 변함이 없었구요. 그의 최신작들을 떠올리면 따뜻한 미소가 지어지지만, 사실 그는 항상 비관적이고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찬 감독이기도 하죠. "미드나잇 인 패리스"의 아름다움은 <그랜드 부다페스트>의 그것과 조금은 닮아있기도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도 여전히 시니컬하고 비관적인 구석으로 인물을 관찰하는 양반입니다. (로저 에버트의 우디 엘런에 대한 글은 그의 영화 미드나잇 패리스가 만들어지고 난 뒤의 글입니다.)
제가 느닷없이 이동진 평론가와 <그랜드 부다페스트>를 이야기하면서 우디엘런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동진 기자가 우디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교양속물'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를 기억하시는지요. 갑자기 졸부가 된 주인공-우디엘런-이 빈곤한 취향과 정신세계를 숨기기 위해 "속성 교양 과외"를 받는다는 내용의 영화 말이죠. 그의 최근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 나오는 엘런 페이지는 <스몰 타임 크룩스>에서 우디가 비웃고 있는 인물들과 닮아있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어려운 작가와 작품을 인용하면서 똥폼을 잡고 남자를 꼬시죠. 속물들에 대한 비아냥과 조소는 우디엘런의 장기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동진 평론가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평에서 그런 우디엘런이 비웃는 인물들의 태도, 따뜻하게 그려지긴 하지만, 사실은 약간 비웃고 있는 <미드나잇 패리스>의 주인공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우디엘런 최근 영화의 외양만 보고 "참 웃기고 따뜻한 양반"이야. 라고 말한다면 우디 엘런이 평소에 얘기하는 감정들 -자살, 삶을 망친것만 같다는 생각-은 휘발되어 버리는 것처럼, 이동진 기자의 이런 '인용'은 뭔가 '핵심'이 없는 포장지의 리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의 이런 태도가 그의 인기비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달콤하기만한 해석은 언제나 그 안에 어쩌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고통'을 숨기고 있기 마련이죠. 이동진 기자에게 그런 고통 까지 이해하고 인용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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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면서 즐겁고 따뜻했지만, 제 취향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그 영화 어때?" 라고 묻는다면, 좋은 영화고 꼭 봤으면 한다고 추천도 해줄 수 있겠지만, 예전에도 적어왔듯, 저는 그런 "달콤한 판타지"에 잘 넘어가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물론 그 작품에도 "씁쓸함"이 있죠) 제가 이동진 기자의 평에서 느낀 불편함과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달콤한 포장"과 "리본"처럼 사용된 "어제의 세계"와 "노스텔지어"에는, 그 안의 진짜 인물과 시대와는 거리가 있으며, 설령 이것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항상 평론가는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와 "인용"의 적절함을 따지며 ,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 없이 단지 낭만적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은 마케팅의 방식이지 비평의 방식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입장이니,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요즘 이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찬 시대에 저런 달콤한 술수로 인기를 끄는 사람들을 보면 제법 많이 씁쓸해집니다. 지금은 유행이 지났겠지만, 한때 난리를 쳤던 '멘토'들과 그들이 자주 사용했던 "힐링"이라는 말에 담긴 달콤함. "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기만"이 요즘 시대의 모든 '달콤함'에서 느껴진다고 하면 제가 너무 예민한걸까요? 하지만 이동진 씨의 저런 "멋있는 한줄평"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기만과 닮아보입니다. 과장일까요? 하지만 이런 시대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윤동주가 시대에 관해 느낀 부끄러움을 츠바이크에게도 읽어낼 줄 알고 그것을 소개한다면 더 좋은 "인용"이지 않았을 까 싶습니다. 요즘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는 감성은 "죄책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P.s
"연민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2014.04.22 01:31
2014.04.22 01:35
제가 짚고 있는 지점은 "웨스앤더슨의 작품에 대한 평인데,굳이 '츠바이크'와 그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쓰고 있는 태도 에 대한 글 같습니다. 근데 적어놓고 몇 번 다시 읽어보니, 약간 과장되게 해석하고,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란 생각이 있네요.
2014.04.22 01:3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언급된 츠바이크의 소설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다시 한번, 좀 더 자세히 영화의 감상을 되돌아보게 되는 글이었어요.
영화 중 마지막 부분에서 소설가가 무스타파에게,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 한 것이 구스타프의 세계에 닿기 위해서냐고 묻자 무스타파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그 때에도 (구스타프가 건재했던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의 화려했던 시절에도) 그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의 말을 한걸로 기억하는데 보면서도 그 대사가 묘한 궁금증을 남겼었죠.
결국 저는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 또는 관객들의 '노스탤지어'가 (츠바이크의 것은 아닌) 존재하지 않는 것,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해갈될 수 없는 상실감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에 공감했던듯 합니다. 이동진씨의 한줄평에서도 때문에 '지나온 적 없는' 이라는 표현이 좀 더 방점이 찍혀 다가오긴 합니다.
하지만 풀어내신 이야기, 그리고 글의 의도 또한 공감이 가네요.
2014.04.22 01:40
동감합니다. 그렇잖아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넘쳐나는 과시스럽고 게으른 태도를 비평가라는 직함을 단 이로부터 보고싶지는 않아요. '어제의 세계'를 인용한 이동진의 글에서 속물적이란 인상을 받았던게 저 혼자만은 아니었군요. 무의미한 인용, 인조크들의 유혹을 피하는게 진짜 글쟁이겠지요.
2014.04.22 01:47
잘 읽었습니다. 이동진이 '어제의 세계'라는 츠바이크의 책 제목을 지나치게 장식적인 맥락에서 사용한 것에는 저도 동의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뭐 크게 나쁘지 않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진의 글쓰기를 언제나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저는 <초조한 마음>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모두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던 세계, 그러나 분명 도처에 단단하지 않은 천박함과 고통과 필연적인 비극의 씨앗들을 품고 있었으며 기어코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무너진 세계를 기억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은 결국 영화 속에서 자세히 말해지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것이었죠. 액자식 구성을 제외하면 얼핏 보기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이지만, 어째서 츠바이크의 이름과 책을 크레딧에 넣었는지는 알겠더군요.
2014.04.22 02:18
정말 요새봤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글 중에서 가장 훌륭합니다. 추천버튼이 있으면 누르고 싶어요.
2014.04.22 02:36
2014.04.22 04:4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예로 드신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와 <투 롬 위드 러브>에서 우디앨런이 그리고 있는 두 집단은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 것 같아요. 간단히 말해 <투 롬 위드 러브>쪽은 '교양 속물', <스몰 타임 크룩스>쪽은 '그냥 속물'이죠. 지적 허영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느냐가 기준점인데, <스몰 타임 크룩스>의 졸부 여주인공 -우디앨런 부인역-은 계급을, <투 롬 위드 러브>의 앨런 페이지는 교양 수준 그 자체를 과시하는데에 있죠. 오히려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남자 주인공이나 그 친구들, 한물간 여배우 역이 <투 롬 위드 러브>의 앨런 페이지와 비슷한 교양속물과인 것 같아요. <브로드웨이를 쏴라>에서 연극 연출가인 남자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 안에 존재하지도 않는 예술적 광기를 증명하려하고, 비슷한 류의 백수 예술가 친구들과 둘러 앉아 각자 얼마나 많고도 깊은 예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뽐내기도 하잖아요. 같은 영화의 한물간 여배우 역도 마찬가지죠. 이 여자는 20년대의 빈티지룩을 입고서 블랑쉬 뒤부아처럼 늘 드라마퀸의 톤으로 뜻 모를 예술적인 말을 일상적으로 쏟아내지요. 이런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캐릭터들은 적어도 지적/예술적 허영에 젖어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스몰 타임 크룩스>보다 훨씬 <투 롬 위드 러브>에 가까워보여요. <미드 나잇 파리>도 비슷한 경우.
실제로 영화 내에서 우디앨런이 각기 그들을 그리는 톤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스몰 타임 크룩스> 쪽의 인물들을 '다소 얼간이같지만 귀여워'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가끔 체념적인 느낌도 들지만요) <브로드웨이를 쏴라>나 <투 롬 위드 러브> 과의 교양속물들에게는 훨씬 더 시니컬하고 비아냥대는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강하죠. <브로드웨이를 쏴라>가 우디앨런 특유의 희극풍으로만 진행되는 것 같지만, 결국 교양속물인 주인공을 '진짜' 예술가인 다른 캐릭터를 통해 어떻게 면박을 주는지를 좀 보세요. 개인적으로는 잔인하기까지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보니 우디앨런은 영화에서 그냥 속물근성의 인물에 대해서는 주로 관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면 교양속물류의 인물들에게는 유독 박하다는 느낌이네요. 어떤 면에서는 동족혐오같은 느낌도 들고요. 교양속물쪽이 좀 더 음흉해보이기 떄문일까요. 뭐 이유야 어찌되었든 우디 앨런이 교양속물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너무 재미있지만요.
이야기가 너무 많이 새버린;것 같은데 이동진 평론가가 우디앨런 영화 어딘가에 나오는 교양속물풍의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런 조소는 직업 특성 상 칼럼니스트나 평론가들이 대부분 달고가야하는 꼬리표같은 거겠죠. 예술을 관람하고 평가하는 태도나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되네요. 다시한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4.04.22 13:01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디엘런 인물들의 층위와 자세한 설명에 대해 감사해요. 확실히 <스몰 타임 크룩스>의 속물들 보다는 말씀하신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속물들이 가까운 예 같습니다.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저의 요지는 우디엘런이 비웃을 것 만 같은 방식의 인용이었다 정도.ㅎㅎ
2014.04.22 07:13
어떤 비평들이 작가의 진짜 의도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차용하기만 한 것 같아 피상적이어 보이고 그래서 불편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이 어딘지는 알 것도 같지만, 이동진 평론가 류의 비평이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딱 그만큼의 감상이 필요한 독자들이 그만큼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나 감상의 층위나 방향이 모든 사람에게 같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아직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지는 않았지만, 비교하신 안나 카레리나 나 마담 보바리 예를 다시 가져와서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들를 정확하게 감상하기 위한 '비평'이라는 회귀방정식을 만든다고 했을 때 분명 행간의 풍자나 작품의 시대배경 등 여러가지 factor를 넣으면 넣을 수록 식의 설명력이 전체적으로 정확해지는 건 사실이라도, 감상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이 역시 표면의 러브스토리라는 서사라면 그 나름대로 의미는 있는 걸테죠.
2014.04.22 13:13
제가 논의한 부분은 단순히 "의도나 맥락" 차원의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가령 소설의 몇 문장을 빌려와서 인용했는데, 그 사람이 논의한 방식과 소설 전체의 내용은 차이가 있다. 정도의 차원이라면 말씀하신 점이 맞겠죠./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그의 인용이 '장식적인 수사'임과 동시에, 츠바이크 라는 인물의 '어제의 세계'가 그가 주제로 잡고 있는 '향수' '그랜드 부다페스트'라는 영화와 깊은 연관이 없고, 오히려 반대급부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츠바이크'라는 인물과 저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인 동시에 '실제 츠바이크'는 '휘발'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인용한 옮긴이 해설에 '그를 단순히 어제의 세계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다루는 인물로 생각하면 안될 것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건 단지 '정확도'정도 차원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말씀하신 맥락에서) 오히려 '보바리'의 정확한 감상으로 다가가는데 '방해'가 되는 인용입니다. 그는 그냥 '장식적인 말'로 폼잡고 있다는 게 약간 저의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2014.04.22 09:09
이건 이번 글과는 다른 글인데 그냥 생각난 몇 마디 말이라 남깁니다. 혹시 이 글에 논점을 일탈하여 결례가 된다면 용서해주세요. 지금 님이 쓰신 다른 글들을 몇개 지금 검색해서 더 보았는데 일관된 코드가 있더군요: 어떤 글의 제목이기도 한 있어보임과 있음, 즉 진정성에 대한 질문 말이죠.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해본적 있고, 취향이든 지식이든 타인의 가벼움을 판단하는 나 ("쟨 진짜 알지도 모르고 그러는거 같은데" "쟨 저거 진짜 좋아서 그런거 아닌거 같은데" 등), 그런 판단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환멸 ("내가 뭐라고 누구를 판단하나" "내가 설마 이런데서 지적 도덕적 우월감 느끼는건가"), 이런 나의 내적 고민을 모르는 타인들, 그리고 나의 특별한 기질에 대한 재인식 ("그래도 이런 고민 안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예민하긴 하지" 등) 뭐 이런 주제를 일상의 다양한 부분에서 느꼈습니다. 그리고 일정부분 자의식이 높아서 생기는 생각의 흐름들인만큼 그런 고민하는 나의 모습을 메타인식(?)하고 ("내가 예민한가?"), 또 이런 나의 생각을 혹시라도 피곤하고 소모적이라고 느낄 상대방의 모습도 미리 생각하고 방어하곤 했죠 ("이런게 피곤하다고 느끼려나. 하긴 피곤하긴 하지").
결론은?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근본적이라는게 있기는 한건가. 진짜 좋아하는 것과 진짜 아는게 뭔가. 뭐든지 꼭 그 소위 '진짜'에서 출발해야만 하나. 저는 이제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말로 진짜와 가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게 내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정말로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어요.
얼마전에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자기는 hifi 음악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다 속물같아 보인다고. 이유는 일단 어느정도 경제력이 기반된 취미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고, 그 외에도 남들을 듣지 못하는 차이를 인지할 수 있는 자신의 예민한 귀 혹은 우수한 취향, 즉 예민함이라는 기질을 우월감과 함께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코드 같다고요. 그런데 또 그런 마음 없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괜찮대요. 그리고 와인이나 커피 같이 취향을 취미로 가진 사람들 다 비슷한 맥락이래요. 흠.. 저는 그냥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처음에 있어보여서 좋아하는 척 했더라도 그걸 계속 하는 사람은 안하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거다.' 라고요.
2014.04.22 13:36
음, 일단 이 글과는 전혀 다른 논점의 얘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ㅎㅎ "진짜 교양"이다 "가짜 교양"이다 차원의 방식으로 이동진 씨를 교양속물이라고 한건 아니니까요. - 이 글은 상세하게 그의 인용-차용이 잘못되었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그 차용이 교양속물들의 그것과 닮아있기도 하다. 고 우디 엘런을 들어 덧붙인 것이고... / 저의 다른 글들을 묶어서, 저라는 사람의 태도 와 고민을 나름의 논점으로 묶어주신 것 같긴 합니다만, 말씀하신 '논점'. "진짜/진정성"에 대한 고민은 저도 오랜 과정에 있습니다. 허나, 그것이 단지 '저'라는 사람의 특성에만 기반한 고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화자가 논하는 주제를 화자 자신의 태도와 평소의 글에서 드러나는 '의식'과 결부해서 이해하면, 더 복잡한 논의가 될 수 밖에 없고, 어떤 지점에서는 결례가 될 정도로 '위험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글에서 드러나는 논점이 아닌, 그 글을 쓴 인물의 '의식세계'까지 포함시켜 얘기하면 논의의 방식은 "논쟁"이 아닌 점쟁이같은 '추정'이 속출하니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진짜 좋아하냐 마냐"의 판단은 제 자신에 대해서는 할 수 있을 지언정, 그것이 남에게 갖다부칠 수 있는 의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저의 지난 글을 쓰고 난 뒤의 반응이고 이에 동의합니다. 허나, 글을 쓰고,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 난 여기서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고민은 글쟁이들의 필수 '퇴고' 과정이고, 이것은 "진짜 좋아하냐" 라기 보다는 "더 엄밀하고 깊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기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언급했던 강신주,허지웅 씨들은 그 과정 자체가 부재해서 오히려 '자신의 해석'을 내새우는 것에 바쁜 사람들 같구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아닌 그런 열정을 가진 "나"가 더 드러나고, 그것이 주제를 향해 파고드는 깊이가 아닌 인정받고 싶어하는 '높이'를 추구할 때, 저는 교양속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다른 글에서도 충분히 다룬 사항입니다. ( <속물교양의 탄생> 이란 책이 아마 제가 고민하는 부분과 거의 비슷한 주제의식을 논하고 있고 이 책은 '진정성'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다시 글로 돌아와, 일단 이 글은 '평론가' 이동진 씨의 수사적 방식에 대한 지적이고, 평론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비판과 지적에서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지식'을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 있어서는 하나의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자가 수식을 잘못 쓰는 것은 단지 "진짜 과학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2014.04.22 13:54
네 무슨말인지 잘 알았습니다. 어차피 이 글과는 연결 없는데 그냥 제가 읽은 Hopper님의 첫 글이라 여기 단거에요. ㅎㅎ 흥미로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댓글에 혹시라도 기분 상하셨다면, 화자의 태도를 일반화하려는 의도 같은건 처음부터 없었으니 마음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관심있던 주제에 대한 첨언의 의도가 컸어요.
음 몇 가지 더 여기에 이야기할게요 이왕 꼬리말로 단 김에.
1) 님이 인용구를 포함 글과 단어의 맥락을 포함한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려고 하시는 노력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글에 작은따옴표, 혹은 따옴표로 수식된 단어가 너무 많아서 약간 피로감이 느껴져요. 그 노력이 피곤하다는게 아니라 글을 읽을 때 정확한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을 독자에게도 똑같이 요구해요. 님이 담고자 하는 그 맥락을 조금만 일반화 해주시면 읽는 사람에게 더 편안하고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2) 원글에서도 지나치듯 보았는데, "갖다붙이다"로 알고 있어요.
2014.04.22 13:57
1> 저도 동의합니다. 뭔가 글을 쓰면서도, 말하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키워서 방점을 찍다보니 생긴 버릇같네요. 줄이겠습니다. 2> ㅠ ㅠ 부끄럽습니다. 수정합니다.
2014.04.22 11:13
2014.04.22 12:5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4.04.22 13:55
() 안에 넣어주신 지적은 이 평뿐만이 아닌 이동진 씨의 한줄 평에 대한 감상으로 저도 동의합니다. 그의 글이, 교양속물로 느껴진 지점은 사실은 유독 이번 영화에서 확연히 느낀 부분이었고.. 다른 평들은 좀 지나치게 카피 같다 는게 제 주관적인 인상 ㅎㅎ..
이동진 기자의 평은 츠바이크의 작품이나 작품관이 아니라, 웨스 앤더슨의 작품에 대한 평 아닌가요?
저는 저 평 보고 잘 집어냈다고 생각했는데요.
비슷하지만 또 다르게 저는 웨스 앤더슨 = 소피아 코폴라 이런 느낌이 들어요.
힙스터의 대부, 대모 같은 느낌.
참 저는 소피아 코폴라 좋아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