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20세기 일본만화 글을 보고 문득 제 첫사랑 베르바라가 떠올라 끄적여봅니다. 마침 얼마전에 재독한 참이라서요.
일단 저는 애니는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초딩 때 엄마가 역사만화인 줄 알고 사주신(...)

11권짜리 대원판을 여동생과 함께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봤죠.

훨씬 나중에 DVD화가 된 후 애니판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나 원작과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평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일단 그림체가 적응 안 된 이유도 있고요. (특히 데즈카 선생이 감독을 맡은 후반부는 작화가 상당히 달라졌죠)
암튼 새삼 다시 읽고 싶어져서 세 권짜리로 나온 애장판을 어찌어찌 구해서 봤는데

어릴 때는 (번역 탓도 있겠지만) 영 이해가 되지 않던 대사나 전개가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이더라고요.
확실히 초딩이 읽기엔 버거운 작품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땐 눈에 별 담은 주인공이나 드레스 구경에 눈이 멀었던 것도 있지만.. ㅎㅎ
제일 인상적인 건 역시 오스칼(오스카 or 오스카르로 읽는 게 맞다죠)의 캐릭인데,

예전에는 어디까지나 앙투아네트를 보좌하는 조연급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정체성 문제에서 시작해 각각 짝사랑의 갑과 을이었던(?) 페르젠과 앙드레를 상대로한 감정싸움에다,

왕권을 수호하느냐 혁명에 동참하느냐 하는 사상적 고민과 목숨을 건 마지막 결단까지,

그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뇌를 끌어안고 있는 인물이란 게 이제서야 보이더라고요.

어릴 때는 그냥 금발머리 왕자님으로만 보였는데 지금은 시대를 앞서간 진취적인 여성상으로 느껴진달까요.
좀 웃기지만 혁명의 기운이 다가옴을 느낀 오스칼의 부모가 그녀를 결혼시켜 여자로서의 삶을 되찾아주려 하는 부분에서는,

요새 제 또래 친구들의 가장 큰 고민인 전업주부냐 직장여성이냐 하는 화두가 떠오르기도 하고;
물론 설정 자체부터 순정만화라는 어법의 틀을 벗어나진 않지만, 만화보단 소설적 인물이라는 평도 있는 만큼

예전에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이야기성이 짙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이케다 리요코가 20대 중반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역사적 고증은 둘째치고라도 이렇게 화려함과 비극성을 두루 갖춘 인물을 그려냈다는 게 놀랍기 그지없네요.
베르바라 이후로도 90년대 한국 순정만화 전성기에 학창시절을 보내온 저도 오스칼 같은 무결점 캐릭터는 달리 잘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무성 혹은 중성적 이미지가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요즘에는 다시 나오기 힘든 독특한 히로인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전장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최후도 한몫하고요. (그러고 보니 이 작품에선 곱게 죽은 사람이 참 없군요;)
핸드폰으로 남겨 두서가 없지만, 암튼 어릴 때 읽은 기억만 있으신 분은 다시 찾아 보셔도 괜찮을 작품 같습니다.
근데 제일 최근에 나온 애장판은 번역이 영 구어체로 바뀌어 예전만 못하다는 평이 있더군요.

좀 촌스럽긴 해도 대원판이 나은 듯.. 익숙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ㅎㅎ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37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45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710
122887 프레임드 #395 [4] Lunagazer 2023.04.10 109
122886 태국 최고의 여배우(?) 신작이 넷플에 올라왔네요. [6] LadyBird 2023.04.10 938
122885 Michael Lerner 1941-2023 R.I.P. [1] 조성용 2023.04.10 177
122884 [넷플릭스] '옆집 사람' [4] S.S.S. 2023.04.10 453
122883 [티빙바낭] 불쾌한 게 좋으시다면, '메갈로매니악: 연쇄살인마의 아이들'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3.04.09 774
122882 일요일 축구에서 쌈 난 기사나 번역 [9] daviddain 2023.04.09 344
122881 프레임드 #394 [2] Lunagazer 2023.04.09 122
122880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회로, 절규 스포일러 [2] catgotmy 2023.04.09 265
122879 베이킹 소다로 운동화를 닦았는데 베이킹 소다 흰 자국이 없어지지 않네요;; [4] 산호초2010 2023.04.09 571
122878 [OCN]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1] underground 2023.04.09 305
122877 조현병에 대해 [2] catgotmy 2023.04.09 519
122876 [영화바낭] 복고 모드 휴식차 챙겨 본 저렴 호러 '슈퍼호스트' 잡담입니다 로이배티 2023.04.08 319
122875 서로를 보듬는 방식에 대하여 [5] 예상수 2023.04.08 496
122874 에피소드 #31 [2] Lunagazer 2023.04.08 108
122873 프레임드 #393 [4] Lunagazer 2023.04.08 108
122872 꼬부랑 말 축구 트읫 몇 개 번역ㅡ음바페 [3] daviddain 2023.04.08 189
122871 이번 주말에 읽을 책은 [5] thoma 2023.04.08 391
122870 다이어트를 하면서 죽상이 되었어요. [5] 한동안익명 2023.04.08 551
122869 [디즈니플러스] 나쁜 번역제 목록 상위권의 추억,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잡담입니다 [11] 로이배티 2023.04.08 605
122868 The truth comes out in the end 이말이 묘한 느낌이 들어요 [4] 가끔영화 2023.04.07 21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