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학당' 이야기, 4

2011.06.12 22:11

한이은 조회 수:2683

 

- 이전 글에 이어, 이븐 루시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인물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뜬금 없이 갑자기 왜 이 둘이 연결되느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그린 르네상스기의 그림들은 주로 이단의 학자들을 등장시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들을 짓밟는(...아래의 그림 참조) 방식을 택하곤 했는데, 그 희생자들로 종종 등장하곤 했던 것이 바로 이븐 루시드였습니다; 지금 보면야 당대 유럽인들의 지적 열등감을 성 토마스를 통해 풀어보려는 한풀이에 불과해 보입니다만, 당시에는 정말로 아퀴나스가 '위대한 종합'을 이뤄낸 대학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대인들에게는 이러한 그림들이 그다지 위화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퀴나스는 많은 이단 학파와 이단 학자들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대항해 많은 논쟁을 펼쳤고, 상당수 거기에 대항해 승리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밑에 있는 이븐 루시드의  상-하 관계와 표정을 자세히 보시길) 

 

-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학자들간의 위치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그림은 바로 필리피노 리피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일 것입니다, 이 그림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예 대놓고 어떤 노인을 한 발로 밟고 서 있습니다(...이런 예의에 어긋난), 짓밟힌 남자의 손에는 '지혜는 악을 정복한다'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아퀴나스가 들고 있는 책에는 '나는 현자들의 지혜를 파괴할 것이다'라는 간지 넘치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아퀴나스에게 패배(?)했다고 여겨지는 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아리우스와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보입니다,

 

- 이러한 배경 하에 라틴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학파와 아퀴나스의 논쟁을  살펴보면 이야기는 더 재밌어집니다, 물론 이 대 두학자, 이븐 루시드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로 직접 논쟁을 펼치지 않았지만, 똑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적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만약 대면했다면 역사상에 길이 남을 대논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문제의 출발점은 당대 유럽의 철학(신학)이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양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것이 거의 모두가 아랍 세계를 통해 전해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고, 때문에 보나벤투라와 같은 이들은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해야 한다고까지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철학과 신학이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영혼불멸설을 부정한 합리주의자인 이븐 루시드는 더욱이 당대 유럽 학자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을 터였습니다,

 

- 13세기 아베로에스 학파의 중심지는 파리 대학이었습니다, 이 당시 파리 대학의 아베로에스주의가 얼마나 강세를 띠었는지 파리 주교 탕피에가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 이단 단죄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와중에 벌어지는 것이 바로 파리 대학의 대표 아베로에스주의자 브라반티아의 시게루스와 아퀴나스의 '지성단일성논쟁'입니다, 시게루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는 굉장히 그에 반대되는 아베로에스주의, 즉 이븐 루시드의 학설을 그대로 따랐는데, 세계의 영원성, 지성의 단일성, 개인 영혼 불멸성의 부정등이 그 주요한 명제입니다, 이중에 아퀴나스가 특히 문제 삼아 시게루스를 공격한 것은 바로 지성의 단일성 문제(일명 '지성단일성논쟁'으로 일컬어집니다)에 대해서인데, 이 지성 단일성에 대한 이븐 루시드의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대한 주석에서 출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에서 영혼과 신체를 두 실체가 아닌, 하나의 단일 실체로 봅니다, 따라서 자아는 순수 정신적 존재로서 독립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에 대해서는 '영혼론'에서 굉장히 특별하면서도 모호한 지위를 부여합니다, 바로 이것이 논쟁의 출발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 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성은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다른 것으로부터) 영향받지 않으며,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성은 그 본성상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즉, 지성은 그 자체로 실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보다 직접적으로 다른 부분에서 반복됩니다('지성은 우리 안에 어떤 실체로서 주어지며, 파괴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지성-실체론에 대한 찬반이나 옳고 그름에 관계 없이 이븐 루시드는 이것을 급진적으로 해석해 밀어붙입니다, 바로 '지성'을 개별적 인간 영혼에서 분리/독립되어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단 하나뿐인 실체라고 해석-주장한 것이죠, 시게루스 또한 이븐 루시드의 이러한 해석을 충실하게 받아들여, 그러한 주장을 인정합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주장이 당시 신학-철학자들에게 위험한 주장이었는가? 이러한 주장에 따라 개별적 지성을 인간에게서 분리하게 된다면, 즉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인 지성만이 존재하게 된다면, 최후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는 개별적 존재인 인간들에게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 아퀴나스는 시게루스와 아베로에스학파, 나아가 이븐 루시드를 반박하며,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 영혼과 육체의 분리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에 대해 이야기한 지성과 영혼의 분리는 이븐 루시드의 왜곡이라고 얘기하죠, 아퀴나스에 따르면, 지성은 실체가 아닙니다, 지성은 영혼과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은 단지 영혼의 다른 부분에서의 분리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퀴나스는 사고의 주체가 한 인간임을 계속해서 입증하려고 한 것이고, 이븐 루시드와 아베로에스학파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단일 실체로서 단지 인간과의 결합에 의해서만 사고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 아퀴나스의 이러한 논증이 성공했는지, 이븐 루시드가 그래서 아퀴나스의 발 빝에 짓밟혔(...)는지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시게루스가 후기에 이르러 이븐 루시드를 부정하고, 아퀴나스를 긍정하는 전향을 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정말로 이븐 루시드는 패배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힐쉬베르거는 어쩌면 그의 평소 학설대로 실제로 '이중진리설'(철학과 신학은 각각 독립적인 세계이며 양자는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어서 양자를 절충할 수 있다는 학설)을 사용해 신학자들의 비위를 맞추었을지도 모른다는 비아냥 아닌 비아냥을 던지고 있습니다만; 진실은 저 너머에...(...)

 

- 어쨌든 이븐 루시드의 학설, 아베로에스주의는 그 뒤로도 파리에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볼로냐와 파두아등지로 옮겨갑니다, 이러한 전통은 17세기까지 유지되다가 르네상스 시기에 형이상학적 분위기가 지워진 순수 자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됩니다, 학설로서의 이븐 루시드의 철학과 학파는 자연스레 사라졌지만, 식자들의 그에 대한 관심은 근대까지 식지 않았습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그는 영혼은 훌륭하지만,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림보'(지옥의 제1층으로, 고대인이나 아기 등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 가 있는 곳)에 가 있는 학자들 중 하나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러한 이교옹호적인 애매한 단테의 글은 지금 봐도 아리송하고, 심지어 에드워드 사이드같은 이들에게는 서구중심주의의 발로라고 까이기도 합니다만, 그 단테의 '신곡'에 등장했다는 것 자체로 의미있다고 봐야겠지요, 또한 우리에게는 종교비평가로 유명한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이의 박사 논문이 '아베로에스와 아베로에스주의'라는 것, 보르헤스 또한 '아베로에스의 추적'이라는 단편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는 것, 이처럼 그는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가끔 환영처럼 우리 주위에 출몰하는 학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 그의 진가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의 문장 하나를 인용하며, 다음 시간을 기약하겠습니다, :) 주말이 끝났군요; '펜은 종이 위에서 바삐 달려가고 있었다. 논지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도록 상호 조리있게 짜여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소한 걱정 하나가 아베로에스의 행복감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저서인 <파괴의 파괴>(부정의 부정)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 줄 그 기념비적인 작품과 관련된 문헌학적 성격의 문제,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의 문제였다. 모든 철학의 원천인 이 그리스인은 사람들로 하여금 터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마치 회교 율법학자들이 코란을 해석하듯 그의 책들을 해석하는 것은 아베로에스가 끈질기게 추구해온 목표였다. 인류 역사상 한 아랍인 의사가 자신으로부터 14세기라는 시간의 간격이 떨어져 있는 한 사람의 사상에 비친 헌신에 필적하는 그런 아름답고 감동적인 예는 찾아볼 수 없으리라.'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베로에스의 추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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