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읽고.

2024.01.15 17:24

thoma 조회 수:291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었어요.

고등학교 때인가 한 번 읽었던 책입니다. 세부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때 읽고 나서 감동 받았던 기억만 남아 있었어요. 

이번에 읽고 나서 인상적인 점은 책의 특정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예상보다 재미를 못 느꼈다는 점이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대략적인 내용의 전개를 안다는 것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심장이 딱딱해진 점이 가장 크겠죠. 특히 종교에 대해.


대략 줄거리를 안다고 해도 좋은 소설이 주는 감흥은 여러 방향에서 오는 것이라 이 부분은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 기억했던 것 보다 고문의 엽기성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장면을 넣어서 전개하지 않고 담담함과 절제가 느껴졌어요. 전체적으로 이런 점은 좋게 보았어요. 크게 긴장을 고조시키는 장면이 없이 가는 소설이었습니다.

 

세부적인 잔재미의 면에서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사실 바탕의 작품이라 해도 소설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이 소설이 담담하다해서 건조한 사실적 문체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유형은 아니었으니까요. 인물의 내면 갈등과 희비의 감정적 굴곡이 그대로 표현되는 소설이거든요. 재미 면에서 외국인 신부가 마을 뒷산에 숨어 지내면서 생길 수 있는 이야기들로는 너무 빈약하지 않았나 했습니다. 소설의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해도요. 


인물의 경우 일본인 관리들의 태도와 말이 생생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다루는 일련의 행위에는 이유가 분명했고 그 행위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도 숙련되고 세련되었습니다. 확신과 여유가 있습니다. 이들과 신부의 관계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 란 말이 생각날 정도지요. 

신부의 내면이 표현되는 부분은 힘이 떨어집니다. 신부의 상황과 갈등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포르투갈을 출발할 때부터, 그게 아니면 중간 기착지인 인도나 마카오에서부터 일본에서 펼쳐질 일들이 예상가능한 범위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지를 다질 때도 의지가 흔들릴 때도 붙잡고 있는 성경의 구절이나 특히 신부가 어릴 때부터 사랑하고 떠올렸다는 예수의 얼굴에의 집착이 너무 부실한 의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오래 전처럼 종교가 있었다면 원래 진실한 것은 연약한 것이고 흔들리는 것이며 언제나 새로운 상처라는, 긍정적인 쪽의 소감을 가졌을지도요. 지금은 이 소설 감상으로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네요. 예수의 아름다운 얼굴을 자꾸 떠올리는 것이 보통 신자들의 약함이긴 하지만 세상 끝까지 찾아온 사제의 마음 속 풍경이 그러한 것은 너무 빈약해 보이더군요. 

'침묵'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이 그렇게도 야속한 것인가, 그제야 새삼스러운 것인가, 원래 그런 분인지 몰랐던 말인가. 침묵하지 않으면 어쩌란 것인지... 


실제로 순교한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워요. 복잡한 마음이 들고. 

이 소설은 82년에 초판이 나왔고 그 이후 개정판이 나오고 쇄를 거듭했습니다. 그런데도 특정 종교를 다루는 책을 내면서 그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제대로 쓰려는 생각이 오랜 세월 없네요. 지식 부족이든 성의 부족이든 암튼 부족한 출판사입니다. '하나님' 표기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잖아요.  


다음엔 [사회학으로의 초대]를 읽으려고 합니다.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이 사 둔 책 중에 선택. 그러다 보니 뭔가 좌충우돌식의 읽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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