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0 10:05
이상하게도 저는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혹시 제 안의 로맨스 세포가 다 말라버린건지, [헤어질 결심] 때부터 많은 이들의 극찬을 받는 로맨스 영화를 보고서도 그냥 밍숭밍숭한 일이 많습니다. 아마 제가 거대한 사건이나 충격, 혹은 복잡한 해석의 실마리를 남기지 않는 영화를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힘이 좀 모자란가봅니다.
일단 해당 작품의 주인공들이 쓰는 한국어가 너무 거슬렸습니다. 후에 찾아보니 직접 코칭까지 받은 교포 영어라고 하는데 이걸 알고 봤으면 더 몰입할 수 있었을지도요. 유태오씨의 연기에는 좀 할 말이 많습니다. 이 분은 종종 한국말을 틀리지 않고 잘 하려는 사람처럼 말을 하는데 이건 다시 봐도 좋아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는 한국 "내수용"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개인적인 경험도 이 영화를 즐기는데 좀 방해가 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리는 '재회'의 경험을 몇번 한 적이 있습니다. 연락이 끊겨서 너무너무 보고 싶었던 사람과 싸이월드로 연락이 닿아서 다시 만나기도 하고, 블로그로 10년만에 누군가를 다시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 때의 설렘이 얼마나 컸는지 다시 곱씹어보면서도 그 재회의 경험들이 결국 별볼일 없이 끝나서 좀 무뎌졌달까요. 그래서 저는 인연에 좀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인연이란 결국 수명이 있고 그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면 반드시 다시 만나서 헤어짐까지 완성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인연을 운명적 만남과 이어짐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저는 인연을 운명적 만남과 그 만남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헤어지지 못한 사람은 때로 인연의 힘으로 정확하게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닐지.
그리고 제 안의 유교맨이 괜히 발끈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배우자를 두고 눈앞에서 꽁냥거리는 이 두 사람을 보면서 네 이놈!! 인연 이전에 천지신명이 노할 것이야!! 하면서 속으로 몇번이나 울컥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사교적인 면에서도 저를 건드렸습니다. 아니 셋이서 만나면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양 옆의 사람을 연결하면서 누구 하나가 소외가 안되게끔 해야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영화가 아예 프레임 밖으로 노라의 남편을 밀어내버리고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서 기가 막혔습니다. 이 세상 매정한...!!
이 영화의 신비로움은 서양적인 시선이라는 의혹도 조금 들긴 했습니다. 노라의 남편은 자신이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아마 노라와 해성의 어릴 적 인연을 자기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와 동시에 그 두 사람이 공유하는 인종적, 국가적 정체성의 뿌리를 신경쓰고 있어서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자신이 더 다가가지 못하는 인종적 정체성의 한계에서 그는 인연의 벽을 스스로 느끼는데, 이것은 인연이란 개념을 훨씬 더 운명적이고 동질한 무엇으로 보는 서양인의 시각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인연은 훨씬 더 일상적이고 쉽게 끊어지거나 다시 맞닿는 것이기에 전 오히려 노라와 그 남편의 현재진행형 인연이 더 깊을 거라고 계속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인종도 언어도 다른 두 사람이 그 시간 그 장소에 그렇게 있었기 때문에 맺어져서 함께 사는 것도 충분히 강력한 인연이라고요.
아마 이것은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쪽으로 이 영화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노라는 이민을 두번 가고, 그렇게 정체성의 뿌리가 계속 희미해져가는데 그러는 가운데에도 자신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어디로 왔는지 계속 고민합니다. 아마 해성은 그런 자신의 뿌리이고 노라가 그를 다시 만나는 행위는 자기 안에 남아있던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과거로 확정하는 그런 의식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가운데 시얼샤 로넌이 주연한 [브루클린]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영화 자체에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다시 보고는 싶습니다. 저의 편견과 개인적인 경험을 좀 떼어놓고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려하면 이 영화가 저에게 재회와 인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가르쳐줄지도요.
2024.03.20 10:54
2024.03.20 10:58
아서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긴 했는데... 영화 외적으로 그래도 다 같이 놀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말았습니다ㅋ
저도 이 영화를 이민자 영화로 볼 때 더 크게 와닿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을 떠나온 사람에게 한국에 있을 때의 인연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더군요.
존 마가로 티엠아이가 재미있네요... 한국어를 잘 한다니 신기합니다 ㅋㅋ 이 배우가 [빅쇼트]의 촐랑이인거 알고 깜짝 놀랐어요
2024.03.20 11:54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었죠.
2024.03.20 12:41
2024.03.20 14:38
2024.03.20 14:56
이것도 신기한 "인연" 이군요... 8천겁의 캐스팅 인연...
2024.03.21 07:38
2024.03.21 08:14
그건 아니고... 원래 past lives라서 전생이라는 제목입니다. 이걸 음차 하다보니 오해가 있을 수 있겠네요.
2024.03.21 08:18
제가 보던 관점과 아주 비슷하게 보셨어요. 한국 내수용 아니고 디아스포라 영화죠.
더 강한 인연이 존 마가로와 이어져 있는 거라는 말에도 동의하고요.
제 직장 동료는 아주 좋았다고 말하면서 저보고 꼭 보라고 해서 봤는데 다들 말하셨다시피 그 잘생긴 유태오가 전형적인 한국남자같지도 않고 말투가 한국 토박이같지도 않아서 공감이 어려웠어요.
여기 사람들은 서브타이틀만 읽었기에 정말 좋았겠지요...
여주인공의 꿈이 노벨문학상, 퓰리처상, 토니상으로 점점 줄어드는 것도 현실적이기도하고 아직 꿈이 있다니 장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넘버3 송능한 감독의 따님이 셀린 송감독이라니 부전 여전이고.. 아카데미 노려봐야죠, 이제 쭉.
2024.03.21 08:33
2024.03.21 11:10
추가로 셀린 송 감독 남편분도 작가인데(영화의 아서처럼) 각본가 데뷔를 한다는군요.
https://www.imdb.com/title/tt16426418/?ref_=nm_flmg_unrel_1_act
루카 구아디노 감독 연출에 요즘 핫한 젠데이아가 주연이고 소재도 재밌어보입니다.
2024.03.21 11:31
아 그 테니스 영화인가요 요즘 시대에 이런 고리타분(?)한 삼각관계 이야기를 내놓는다고 해서 오히려 흥미로워보였어요
2024.03.21 13:06
예고편에 보면 쓰리썸...을 예고하는 장면도 있고 루카 감독이니까 시시한 영화는 아닐 것 같은 기대가 있어요.
그런데 영화가 바 씬에서 그렇게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면서 남편을 아예 무시하는 게 아니라 씁쓸해하는 표정을 따로 잡아주면서 그 상황이 아서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뻘쭘한지도 분명히 강조하고 있기에 이게 영화의 단점이라거나 지적할 부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거기서 노라와 해성을 뭐라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들겠죠. ㅋㅋ 하지만 분명 그날 저녁 초반에는 셋이 다같이 어울리려고 나름 노력하다가 술도 들어가고 사실상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 무의식적으로 둘의 서로 마음에 남아있던 얘기를 다 쏟아낼 수 밖에 없어지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구요.
2회차 관람을 했는데 결국 이건 이민자 노라가 나영(해성과의 인연)과 이별하고 나아가는 디아스포라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부가 서로 침대에서 나누던 대화씬만 봐도 작품에서 얘기하는 그런 '인연'이 아니더라도 둘은 충분히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부부로 오래 해로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레타 리는 한국어 연기를 봉준호 감독 통역사로 유명해진 샤론 최의 코칭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어릴 때 이민 온 "annoying theater kid" 컨셉이었다고 해요. 유태오 본인은 외국에서 살다와서 한국어가 서툴고 영어가 유창한데 반대로 연기를 하다보니 미나리에서 스티븐 연하고 비슷한 상황이 된 것 같아요. '전형적인 한국남자'라고 표현되는데 전혀 아니라서 거기서 오는 위화감이 오히려 재밌죠. 이건 외국에서 주로 살아온 감독의 생각이라서 그런지도... 그리고 여담으로 아서 역의 존 마가로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과 결혼해서 실제로는 한국어를 좀 하는데 여기서는 더 못하는 것처럼 연기를 해야했다고 합니다.